2021년 1월 모임 <픽션들>






<픽션들>

발제

전영현

발제문


위치

모두의 집

후기



준민

1. 매년 독한녀석들에 참석하면서 얻은 개인적인 통계치가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모임에 참석하고 책도 끝까지 읽어갑니다만, 2년에 한 번 정도 모임을 불참하고 1년에 한 번 정도 완독하지 못합니다.

그 1년에 한 번이 1월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다 못 읽은 상태에서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이 되는데 <픽션들>은 진짜 어려웠어요. 요새 책이 진짜 안 읽히고 그래서 난해하게 느껴진 글이 꽤 많았는데 <픽션들>은 그것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어려웠어요. 

이 어려운 책으로 어찌어찌 2시간 넘게 모임을 해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에피소드별로 다양한 질문을 준비해온 진행자 덕이 아닐까 싶습니다. 

2. 여러 질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운명과 필연 그리고 자유의지였습니다. 이 부분은 예전에 한 번 생각해 둔 것이 있는데 지금 다시 돌아봐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습니다. 아래는 예전에 제가 블로그에 썼던 글입니다.

나의 경우 모든 과거의 일은 운명이라고 믿는다.
(중략)
현재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면 그 사건이 발생하기 위한 여러 정황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린 아이일수록 여러 상황들이 적게 쌓여 있을 것이고,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여러 요소들이 많이 쌓여 있을 것이다. 여러 요소들이 많이 쌓이면 쌓일수록 사람 운명의 폭은 좁아지게 (좀 더 구체적으로) 되고 선택의 폭도 줄어든다.

여전히 저는 운명이란 존재하고 지금시점에서 돌아보는 모든 일은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운명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수긍하기 쉬우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선택 가능성을 조금 더 열어 놨던 것 같기도 한데 요즘은 선택 가능성에 대해서 조금 더 회의적이 되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잘 정리가 잘 안 되네요. 그래도 과거에 대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맞던 틀리던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작은 불확실성을 가지게 되니까요. 그래서 요새는 운명이 있는지 없는지 고민하기 보다는 지금 제가 뭘 할 수 있는지를 더 고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작년에 드라마 <스타트업>을 봤는데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래도 맨 마지막에 달미가 했던 대사만큼은 꽤 좋았습니다.

“일단 빌어. 그리고 니가 이루면 돼.”

3. 이 주제가 워낙 재미있었는지 토론 끝나고 다음 달 토론 후보 도서 정할 때 기존에 가져왔던 책이 아니라 다른 책을 꺼냈어요. 하나는 다카노 가즈아키의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다른 하나는 손보미의 <디어 랄프 로렌>. 

<6시간 후 너는 죽는다>는 미래를 보는 예지자가 주인공인 소설로 운명과 자유의지를 다루는 작품입니다. <디어 랄프 로렌>은 과거에 벌어졌던 어떤 사건을 추적하면서 그 일이 자신에 어떤 의미였는지 돌아보는 이야기입니다(라고 하면 좀 왜곡이 있는데 넘어갑시다). 그런데 바꾸기 전에 선정했던 도서에 있던 우다영의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도 자신의 전생과 이번생을 전체적으로 알아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아무래도 저는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4. 하지만 다들 아시겠지만 2월 선정 도서는 매슈 레이놀즈의 <번역>이 되었죠. 바꾸기 전에 먼저 생각했던 후보 도서는 어떤 것이 있냐고 물어봐서 소개를 했는데 이 책을 읽어보자는 의견이 많아서 최종적으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선정의 이유는 제가 최근에 드라마 <런 온>을 재미있게 보는데 (후기를 쓰는 시점에서는 완결이 되었습니다.) 여자 주인공인 미주의 직업이 영화 번역가입니다. 자연스럽게 사 놓고 보지 않았던 <번역>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좁은 의미로서의 번역이 아닌 의사 소통 전반을 아우리는 개념으로써 번역을 다루는 책이고 드라마 <런 온>도 그런 광의의 의사소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드라마 자체는 그냥 저냥 무난해요. 범용적으로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로맨스 드라마 좋아하시면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나저나 이런 거 보면 될 책은 되나 봅니다. 중간에 후보 선정 도서를 바꿨는데도 원래 골랐던 책이 되었으니까요. 아마 <픽션들>로 2021년을 시작한 것도 운명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세진

1.

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쓰는 행위, 그러니까 단 몇 분 만에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장장 오백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리는 것은 고되면서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정신 나간 짓이다. 이미 이러한 책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그것들에 관한 요약, 즉 논평을 제공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중략) 더 분별력이 있고, 더 요령 없고, 더 게으른 나는 가상의 책 위에 주석을 쓰는 편을 택했다. (p.10 / 서문 중에서)

서문을 봤을 때 깨달았어야 했다. 픽션에 대한 픽션을 쓰는 작가라니. 가상의 이야기로 가상의 이야기를 추론해야 한다니. 더 분별력 있고, 더 요령 없고, 더 게으른 이 천재 작가가 쓴 픽션을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토론에서는 20%나 이해했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진행자의 말처럼 ‘전체가 얼마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대로 커져나갔기 때문에 사실상 이해도는 0%로 수렴했다. 토론 후에 몇 번이고 책을 다시 펼쳐보려고 했는데 이미 읽은 단편조차 다시 읽는 것이 힘겨워서 덮어버렸고, 토론 중에 메모했던 내용들을 살펴봐도 내가 어떤 흐름에서 이런 생각들을 했는지 복기가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눈 먼 장님들끼리 코끼리를 더듬어가며 추상화를 그리는 토론을 한 게 아니었나 싶다. 그럼에도 무한으로 확장하는 텍스트 속에서 의미 있는 질문들을 끌어올려 준 발제자님 덕분에, 소인원의 토론에서도 대화가 꽉 차게 이어졌다. 나긋한 대화 속에서 치열하게 생각하고 이야기하며 에너지를 완전 연소시켰던 것 같다.

2. 

퀘인은 항상 독자란 이미 멸종된 종족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또 그는 문학이 줄 수 있는 많은 행복 중 최고의 것은 상상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없기에,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흉내낸 것에 만족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p.96 / <허버트 퀘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중에서)

문학의 고유성, 저자와 독자의 경계에 대한 논의가 기억에 남는다. 독자는 저자들이 쓴 문학 텍스트를 자신의 언어로 읽는다. 독자마다 고유한 언어로써 원형 텍스트가 가진 의미를 번역하므로, 독자는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된다. 또한 저자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수많은 원형 텍스트를 읽고 흡수하고 참조한다. 따라서 저자는 태생적으로 독자일 수밖에 없으며 문학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동안 일개 독자로서 텍스트를 실컷 탐닉해왔을 뿐 그 본질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토론을 통해서 독자와 저자와 텍스트(책)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한 우주를 상상해본 것 같다. 작가의 입장에서 하나의 원형 텍스트는 수많은 텍스트와 중첩되고 연결되므로, 그 자신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없다는 회의주의에 빠질 수도 있으리라. 반면 독자로서 나는 하나의 텍스트를 통해 무한한 우주를 읽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본다. 책이 책을 부른다.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의 흔적들을 떠올리며, 독자로서 상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것이 비록 흉내낸 것일지라도.

3.

아마도 늙고 두려움을 느끼는 탓에 내가 속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유일한 종족인 인류가 멸망 직전에 있다 해도 ‘도서관’은 불을 밝히고 고독하게, 그리고 무한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소중하고 쓸모없으며 썩지 않고 비밀스러운 책들을 구비하고서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p.109 / <바벨의 도서관> 중에서)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세계를 거대한 도서관으로 그려내는 보르헤스의 상상에 동참한다. 삶과 세계는 텍스트이다. 우리는 세계의 진리를 찾아 도서관을 실컷 헤매다가 삶을 마감할 것이다. 소중하고 쓸모없으며 썩지 않고 비밀스러운 책들을 읽어나가며 도달하지 못할 지(知)를 동경한다. 전혀 이해하지도 못한 <픽션들>을 굳이 꾸역꾸역 읽겠다고 손을 들었던 마음도 무지한 자의 동경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무한한 도서관에서 열심히 방랑하면서 살고 싶다.


병주

보르헤스의 소설은 어렵고 난해했다. 책도 다 읽지 못했으며, 1부도 토론전에 간신히 읽었다. 다만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조차도 그의 뛰어남은 알 수 있었다.   

<방대한 양의 책을 쓴다는 것은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는 정신나간 짓이다. 단 몇 분에 걸쳐 말로 완벽하게 표현해 보일 수 있는 어떤 생각을 500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어뜨리는 짓. 보다 나은 방법은 이미 그러한 생각들을 담고 있는 책들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하나의 코멘트, 즉 그것들의 요약을 제시하는 척하는 것이다. > 서문

이 소설적 기법은 정말 천재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의 머릿속에는 나름 그럴싸한 아이디어가 하나쯤은 있다. 다만 머릿속에서 그럴싸한 아이디어가 내 손을 통해 글로 작성될 때 형편없는 이야기로 변한다. 그 형편없는 이야기를 붙잡고 퇴고하며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이 지루하고 어렵기 때문에 소설을 쓰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다만 보르헤스는 완성된 책을 가정하고 논평을 하는 소설적 장치를 통해 그 어려움을 피해갔다. 그는 논평에서 존재하지 않은 틀륀에 관한 아이디어를 제시했고,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일부만을 구체화했다. 그리고 그가 구체화하지 않은 틀륀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겼다. 만일 그가 틀륀의 언어, 그리고 틀륀의 모든 형이상학적인 사고들을 구체화했다면 명쾌하고 재미있었을까? 오히려 그가 제시한 요약보다 더 이해하기 어렵고 지루한 책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이 소설적 장치를 통해 그의 노력은 줄었으며, 소설의 완성도는 높아졌다. 다시 봐도 정말 대단한 발상이며 이런 독창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보르헤스에 열광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영현

1. 책에 대한 후기

<픽션들>을 처음 만난 순간은 그랬다. 감히 이 책은 내가 읽어본 몇 안 되는 책들 중, 가장 어려웠던 책 다섯 권 안에 가뿐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라고 말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어떤 책이라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사실 쉬워보이는 동화 한 편 조차도 100% 이해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이 책은 백분율로의 정량화를 위한 전체가 어느정도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운명이었을까, 발제를 준비하며 다시 만나게 되었고, 두 번째 만난 <픽션들>역시 여간 만만한 책이 아니었다. 물론, 처음 읽을 때 보다는 ‘아주 조금’은 나아졌지만.

‘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쓰는 행위, 그러니까 단 몇 분 만에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장장 오백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리는 짓’을 고되며 정신 나간 짓이라고 칭하는 보르헤스는 꽤나 효율성을 꾀하는 작가인 것 같다. 덕분에 독자는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상당한 비효율을 수반한 역경을 겪어야만 한다. 그러나 <픽션들>을 이해하기 위해 겪게 되는 그 여정이 그저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실존에 대한 고민은 인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배제되지 않았었다. 시대가 변하고, 문명이 발달되며 더욱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컨텐츠가 많아지고, 그런 산물을 즐기다 보면 쉴 새 없이 시간이 지나간다. 그런 산물과 거리를 두는 순간들에도 그 산물들을 통해 야기된 궁금증으로 생각을 채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생각이 끊임없이 꼬리를 물다 보면 다시 근본적인 문제로 회귀한다. 실존이란 무엇인가. 나는 실존하는가. 실존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먹고살기에 바쁜, 철학에 냉소적인 현대인들은 이렇게 답할 수도 있겠다. 그게 뭐가 중요해? 지금 당장 취업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내 업무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그게 과연 내 삶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일차원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현대인들조차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찾고, 증명하려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타인에게서 비춰진 내 모습을 보고 내 존재를 찾으려 하며, 직장에서의 지위나 평판을 통해 사회적인 나의 존재를 찾으려 하며, 가정을 꾸려 나와 같은 유전적 특성을 공유하는 작은 사회에서 나의 존재를 찾으려 한다. 인간은 그런 존재이다. 비록 실존에 대한 고민을 직접적으로 하고 있지는 않더라도, 실존의 증명을 위한 활동과 그 방식에 대한 고민을 단 하루도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수많은 방법 중에서도 과연 어떤 것이 ‘온전한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길인지 답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살아가다 막막해지는 순간이 오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그런 고민에 부딪혀본, 혹은 겪고 있거나 겪을 우리에게 <픽션들>은 충분히 읽어볼 만한 책이 아닐까. 물론, <픽션들> 역시 그 답을 내려주지는 않는다. 어떻게 보면 오히려 무수히 많은 이슈를 던지며 생각할 거리를 늘려 더욱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수도 있다. 다만 그런 생각을 해볼 수 있다는 것을 안 뒤에, 일상 속에서 틈틈이 고민하다 보면 언젠가 가장 이데아에 가까운 답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먹고사는 것과 관계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여길 사람들에게 그럼에도 이 책을 추천하고자 한 가지 포인트를 짚자면, 1부의 <허버트 퀘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에서는 독서는 주체와 대상이 명확히 구분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그 내용을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그렇다면 어떤 활동에서 주체와 대상이 명확히 구분될 수 있을까? 요즘 같은 초연결 시대에 그런 것이 존재할까? 서비스 생산자와 수혜자의 경계가 모호하며, 수혜자가 또 다른 생산자가 되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경계는 무의미하다. 그리고 그것이 꽤나 당연하다고 2021년의 우리는 쉽게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으로 확산될 수 있는 의문이 1944년에 출판된 책에 담겨있다면, 이 책을 여전히 역사 속의 고전일 뿐이라 할 수 있는가?

2. 토론에 대한 후기

하지만, 토론으로 적합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조금 남는다. 우리 모임에서 ‘토론은 어때야 한다’고 정의하는 바는 회원님들마다 다르겠지만, 본인은 개인적으로 본 모임의 토론은 책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토론에 참여한 후 책에 대한 이해도가 더욱 높아진 적이 많아 그 경험이 긍정적이었기도 하고. 

그렇기에, 발제자 역시 반드시 책의 대부분을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지 않을지 몰라도 ‘어느 정도 이상’의 이해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논의의 범위를 정하고 그 안에서 다른 참여자들의 사고를 더욱 깊이 있게 끌어내주려면 말이다. 따라서 그런 점에서, 발제자가 지나치게 이해하기 어려운 책을 후보로 들고 갔다는 것이 큰 실수라고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은 토론자분들이 오디오를 꽉 채워주셨고, 어려운 책에 어려운 질문에 대해서도 좋은 의견을 들려주셔서 많이 뜻깊은 경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우연과 필연에 대한 논의가 인상깊었다. 일어난 일은 모두 필연이라는 말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공감이 가는 것 같아서, 종종 생각이 날 만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또한 혼자 생각할 때는 앞으로의 문학은 기존 문학의 답습만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새로운 장르가 탄생할 수 있겠다는 점을 제시해주신 점에 대해서도 굉장히 놀라웠다. 확실히 혼자 읽기만 했을 때보다는 회의주의적 사고에 덜 갇히게 된 것 같다. 

<픽션들>을 읽으며 발제자에게 회의적인 생각이 많이 들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픽션들>을 읽으며 갇혀버린 발제자의 회의적인 사고를 토론에서 깨부숴준 참여자분들께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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