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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모임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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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진행 준민 발제문 다운로드 위치 모두의 집 후기 미정 책이나 토론을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짧게나마 느낀 점을 말씀드립니다. 번역이 된 글이 주는 어색함이 싫어 외국문학을 멀리하기도 했는데, 사실 번역이 수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어려운 선택을 하고 조합해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번역가들이 만든 고통의 산물을 조금은 더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더 곱씹어봐야겠습니다. 사실 전에는 번역은,매칭되어야할 소수의 자국어가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번역의 의미의 스펙트럼처럼, 가능한 번역은 무궁무진하고 무엇이 최선이고 좋은지는 상황에따라 해석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저도 번역처럼 일상에서 여러 선택을 하고 이것을 조합하는 순간에 수없이 맞딱뜨립니다. 누군가는 제가 외국문학을 대하는 것처럼 제 해석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겠지요. 모두가 너그러울 수 없으니, 조금 더 개성있고 주관있는, 넓은 의미의 번역을 해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현정 이번 토론 도서인 번역은 앞단의 내용들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독서였다는 만족감을 주었습니다. 그 동안은 번역이란 건 언어 간의 해석과 통역 정도로만 생각을 해왔었는데, 책을 통해 사람들과의 대화 안에서 수많은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 책을 읽으며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던 부분입니다. 책에 대한 내용은 간단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구요. 이번 토론은 특히나 책 내용 자체에 집중한 것도 즐거웠지만 자연스럽게 파생된 다른 질문들이 더 좋았습니다. ‘런 온’을 감명깊게 보고 온 발제자님 덕분에 “내가 통역사라면?” 이라는 가정하에 논의 되었던 질문이 각각의 참여자에게 다양하게 받아들여졌던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토론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직업군에 대한 이야기도 ‘번역이 필요한 부분’이라는 점으로 공유하다보니 dau나 교사에게 부장이란 직책은 무슨 의미인지 등 다른때보다 생소하고 개인적으로 유의미했던 방향으로 토론이 진행되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 사정으로 토

2021년 1월 모임 <픽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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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발제 전영현 발제문 다운로드 위치 모두의 집 후기 준민 1. 매년 독한녀석들에 참석하면서 얻은 개인적인 통계치가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모임에 참석하고 책도 끝까지 읽어갑니다만, 2년에 한 번 정도 모임을 불참하고 1년에 한 번 정도 완독하지 못합니다. 그 1년에 한 번이 1월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다 못 읽은 상태에서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이 되는데 <픽션들>은 진짜 어려웠어요. 요새 책이 진짜 안 읽히고 그래서 난해하게 느껴진 글이 꽤 많았는데 <픽션들>은 그것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어려웠어요.  이 어려운 책으로 어찌어찌 2시간 넘게 모임을 해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에피소드별로 다양한 질문을 준비해온 진행자 덕이 아닐까 싶습니다.  2. 여러 질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운명과 필연 그리고 자유의지였습니다. 이 부분은 예전에 한 번 생각해 둔 것이 있는데 지금 다시 돌아봐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습니다. 아래는 예전에 제가 블로그에 썼던 글입니다. 나의 경우 모든 과거의 일은 운명이라고 믿는다. (중략) 현재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면 그 사건이 발생하기 위한 여러 정황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린 아이일수록 여러 상황들이 적게 쌓여 있을 것이고,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여러 요소들이 많이 쌓여 있을 것이다. 여러 요소들이 많이 쌓이면 쌓일수록 사람 운명의 폭은 좁아지게 (좀 더 구체적으로) 되고 선택의 폭도 줄어든다. 여전히 저는 운명이란 존재하고 지금시점에서 돌아보는 모든 일은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운명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수긍하기 쉬우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선택 가능성을 조금 더 열어 놨던 것 같기도 한데 요즘은 선택 가능성에 대해서 조금 더 회의적이 되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잘 정리가 잘 안 되네요. 그래도 과거에 대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맞던 틀리던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작은 불확실성

2020년 12월 모임 <일의 기쁨과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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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발제 배병준 발제문 다운로드 위치 모두의 집 후기 종찬 1. 이십대 중반쯤이었던 거 같은데, 사람의 행동을 겁많은 초식 동물에 비유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지금 기억에 거기에서 비유한 특징은 이런 것들이었다. - 무리지어 다니지 않으면 안심하지 못한다. - 누군가가 약하다는 이유로 희생양이 되었을 때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며, 다음에도 다른 사람이길 기도한다. - 그래서 누구의 눈에도 안 띄는, 평범함을 추구한다.  - 모난 돌이 정 맞는 건 당연하며, 필요한 경우 그 정 직접 휘두를 용의도 있다. (하지만 직접 휘두르는 건 ‘눈에 띄는’ 행동이기 때문에 최대한 숨기거나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자 한다.) 처음에 이 묘사를 듣고서는, 굉장히 혐오스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렇게 비겁하고 비굴하게 살아야 하나? 좀더 당당할 수는 없을까? 그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어른이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저 특징들을 떠올렸다. 어른으로서의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저런 특징들을 체화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졌다. 2021년이 눈앞에 닥친, 삼십대 중반에 접어드는 나는 지금도 여전히 어떻게 보나 어른은 아닌 것 같다. 이 사실에 고통받고 있는 절친한 친구도 있는데, 미안한 일이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아마도 나는 빛나 언니 쪽에 좀더 가까운 것 같다. 하지만 그만큼 순수하지는 않다. 빛나 언니보다도 훨씬 겁이 많은 나는, 어른이 된 것도 아닌 주제에 꽤나 초식 동물에 가까운 사람이 되어 있는 것 같다. 내가 가진 한줌도 안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믿을 수 없이 비겁해지고 비굴해지는, 그냥 작은 사람. 그러니 나에게는 빛나 언니든 화자든 그 나름대로는 다들 대단해 보였다. 뭐 하나라도 지켜내는 거 같아서. 2. 이십대 중반에는 그런 말도 많이 들었다. 꿈이 있는 게 부럽다는 이야기. 자기들은 꿈이 없단다. 너처럼 하고 싶은 거 하는 사람이 부럽단다. 그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