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모임 <일의 기쁨과 슬픔>




<일의 기쁨과 슬픔>

발제

배병준

발제문


위치

모두의 집

후기

종찬

1. 이십대 중반쯤이었던 거 같은데, 사람의 행동을 겁많은 초식 동물에 비유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지금 기억에 거기에서 비유한 특징은 이런 것들이었다.


- 무리지어 다니지 않으면 안심하지 못한다.

- 누군가가 약하다는 이유로 희생양이 되었을 때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며, 다음에도 다른 사람이길 기도한다.

- 그래서 누구의 눈에도 안 띄는, 평범함을 추구한다. 

- 모난 돌이 정 맞는 건 당연하며, 필요한 경우 그 정 직접 휘두를 용의도 있다. (하지만 직접 휘두르는 건 ‘눈에 띄는’ 행동이기 때문에 최대한 숨기거나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자 한다.)

처음에 이 묘사를 듣고서는, 굉장히 혐오스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렇게 비겁하고 비굴하게 살아야 하나? 좀더 당당할 수는 없을까? 그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어른이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저 특징들을 떠올렸다. 어른으로서의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저런 특징들을 체화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졌다.

2021년이 눈앞에 닥친, 삼십대 중반에 접어드는 나는 지금도 여전히 어떻게 보나 어른은 아닌 것 같다. 이 사실에 고통받고 있는 절친한 친구도 있는데, 미안한 일이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아마도 나는 빛나 언니 쪽에 좀더 가까운 것 같다. 하지만 그만큼 순수하지는 않다. 빛나 언니보다도 훨씬 겁이 많은 나는, 어른이 된 것도 아닌 주제에 꽤나 초식 동물에 가까운 사람이 되어 있는 것 같다. 내가 가진 한줌도 안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믿을 수 없이 비겁해지고 비굴해지는, 그냥 작은 사람. 그러니 나에게는 빛나 언니든 화자든 그 나름대로는 다들 대단해 보였다. 뭐 하나라도 지켜내는 거 같아서.

2. 이십대 중반에는 그런 말도 많이 들었다. 꿈이 있는 게 부럽다는 이야기. 자기들은 꿈이 없단다. 너처럼 하고 싶은 거 하는 사람이 부럽단다. 그런데 지금 보면 그런 얘기 했던 사람들 참 잘 살고 있다. 꽤 오랫동안 나는 꿈과 직업을 혼동했었다. 장래 희망란에 답변이 항상 직업이어서 헷갈린 건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이제 와서 보니 직업에서 만족을 얻는 게 삶의 목표가 될 수가 없더라. (될 수 있더라도 이루면 또 다른 게 필요하겠지)

장우의 꿈이 인정받고 자존심 있는 뮤지션에서 그저 강아지 한 마리 사랑하고 지킬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뀐 것처럼, (그래서 자기 음악이 아닌 걸로 음원을 출시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된 것처럼) 뭔가 돈벌이 수단보다 더 의미있는 것이 인생에 있지 않을까.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 찾는다면 그때는 장우만큼이라도 진심이 될 수 있을까.

3. 이 책을 읽는 동안 불편했던 감정들의 정체가 이런 것들이었던 거 같다. 책속 인물들에 비해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나를 마치 나무라는 것 같아서. 나에게 더 노오오오오오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 토론을 하며 들어 보니… 다들 그런 불편함은 없었던 거 같고, 장우나 빛나는 역시 그저 한심한 친구들인 모양이다. “내가 말을 잘 하는 게 아닐까요?” 하는 문장을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더이상 자학개그로도 쓸 수 없는 착잡한 충격.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 내가 봐도 한심해 보이니까… 한심한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거 자체가 마치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 같은 느낌이라, 그게 한심한 거 같아 뱉으려던 말을 삼켰다. 그런걸 공감하고 다닐 시간에 나나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며 사는 게 지금 해야 하는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먹먹했다.

4. 좀더 희망적인 말을 붙이고 싶어서 4번을 적었지만, 상투적인 얘기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괜히 거짓말을 해서 나은 사람인 척 하는 것도 한심한 건 마찬가지고. 여기서 정리하고 홀가분해지기 보다, 좀더 충격 상태에 머무는 일이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현정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불편한 것들을 참으로 다채롭게 담아낸 책이다. 섬세하면서도 거침없는 필력으로 공감대를 무한대로 올렸다가도 순식간에 스팀을 확 끓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잘 살겠습니다’에서는 본인 혼자만 세상 마음 편하고 주변 사람들은 불편하게 만드는(본인 마음속이야 모르는 거겠지만) 빛나 언니를 보면서 화자에 감정이입을 하며 성을 냈다면, 적당 수준의 기브앤테이크가 아닌 한 치의 오차 없이 주고받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화자를 돌연 보면서 롤러코스터를 탄 것 마냥 내 감정이 이리저리 휘둘린다. 부디 둘 다 잘 살고 있기를 바란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직장인이라면 크게 공감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업무 진행방식에서 꽤나 차이가 있는 나에게는 스크럼 자체도 생소하게 다가왔고 개발자에 대한 이해도 조금 생겼다고 할까? “맞아맞아!” 보다는 “오호”가 맞겠다. 누군가의 회사생활을 엿보는 생생함에 즐겁고 실제 일어날 것만 같은 불합리함에 분노했다. 항상 대화를 하거나 어떠한 상황에 부닥쳤을 경우,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라고 스스로를 자위하는데.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마지막에 나오는 할머니가 마시고 있던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보면서 과연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온전하게 벗어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뭐랄까.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이었어서. 책 한권을 다 읽고나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을 꼽으라면 남자가 커피가 담긴 종이컵에 동전을 넣는 부분이라고 말하겠다. 삶의 한 조각조각에서 키워드를 캐치해 이런 글들을 녹인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작가가 가진 매력이 아닐까 싶다. 코로나로 강제 집집순이가 되어가고 있는 요즘 ‘탐페레 공항’은 지난날 다녀왔던 여행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하는 따뜻함과 찡한 무언가를 가져다준다. 사실 여행 이야기만 담겨있지는 않지만 나는 좀 치우치게 읽었다. 누군가는 취업 준비에 정신없었던 화자의 생활과 감정에 더욱이 공감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따뜻한 여름날의 유럽과 같은 글이었다. 언제나처럼 토론은 참 즐거웠고 후기를 작성하는 건 차일피일 미루게 되지만 이번엔 기록을 늦지 않게 남겨놓겠다! 발제하고 진행하느라 수고하신 발제자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영현

1.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쉽게 읽혔다. 그리고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토론 때 "이런게 책이면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라고 느꼈다는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딱 그 느낌이었다.

2. 하지만 책을 읽은 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책의 진가가 크게 느껴졌다. 책 속에 등장하는 여러 에피소드들이 일상 속 일을 하는 와중 문득 떠오른다. 그리고 그 상황에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지금 이런 상황들도 그와 유사한 상황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책 내의 모든 작품이 나 또는 지인의 이야기였거나, 내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에피소드라는 사실을 전달해주는 책. 이 책은 그런 책이다.

3. 그래서 토론 중에도 다들 한 번쯤 생각해봤을만한 주제에 대한 서로 다른 가치관을 들을 수 있어 유익했다. 그랜드 피아노라는 비유에 대해 그랜드 피아노에게 어울리는 공간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 않냐는 단순한 문제만을 제기했는데, 다른 분이 그랜드 피아노에게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제공해주어야 하는 기본적인 환경이 있지 않을까 하는 부분을 짚어주신 것이 흥미로웠다. 빛나 언니에 대한 상반되는 시선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주변에 있을 법 한, 혹은 내가 그랬을 법 한 인물이기에 빛나 언니에 대한 여러 의견을 들어보는 것도 좋은 기회였다. 

4. 나이가 들고 주변 환경이 바뀐 뒤, 그랜드 피아노라는 비유를 비롯해 여러 표현과, 작품 속 여러 인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떻게 변화할지 궁금하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타인에게 어떤 인물과 비슷할지 궁금하다. 그리고 작품 전반에서 느낄 수 있던, 일에 대한 애증이 미래의 나에게도 비슷한 결로 남을지 궁금하다.


동진

장류진이라는 작가는 이번 독토로 처음 알게된 작가인데 소설자체는 재밋고 쉽게 읽힌 책이다.문체가 쉽고 매우 신변잡귀적이어서 웹에 올린 소설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고 봤는데 실제로 그래서 인상적이었으며

내 주변 일상에서 이런 소재,상황으로도 이렇게 글을 뽑아 낼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소설이 이리 쉽게 써질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소설이다.(책의 쉽게 씀에 대한 병준이의 언급에도 일정 동의하는바이다)

문체나 내용이 마음의 여운을 남기거나 기억나는 표현이 있는 그런 책은 아니었으며 하이퍼리얼리즘이라는 말이 적절하게 어울리는 책이었다.(그리도 토론 후에 템페레 공항은 뒤늦게 읽었는데 나도 이작품이 가장 맘에 들었다. 왜 가장 손을 많이 들었는지 알겠다는...)

일과 관련된 토론책이 지금까지 2-3번은 했던 기억이 있는데 중복된 애기가 많이 나올줄 알았지만 다른 많은애기도 나와서 재미었던 토론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금전으로 일이 굴러가게 하고 남의 일을 해주고, 나의 일을 하게하고,사람을 부리는자,부림을 당하게 되는자, 그 사이에서 내 존엄과 따뜻함을 지키는 것,냉소적으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본인이 의식하고 생각하면서 살지 않으면 느끼지 못하고 그냥 하루하루 지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뭐 그런거 신경안쓰고 돈잘벌고 잘써도 되겠지만서도 한번쯤은 쉬어가는 타임에 생각에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이번년도에는 일의 슬픔이 더 와닿은 한해였고 후기를 쓰면서 생각해보니 올해 재테크에 몰두한 이유를 생각해보니 경제적 자유를 얻어 일의 기쁨을 얻기 위한 작은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모두 일에서도 또 일터 밖에서도 기쁨을 좀더 얻는 2021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준민

1. 매년 12월과 1월에는 올해 (혹은 작년에) 무슨 일이 있었나 정리해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지금도 한참 그럴 때라 어떤 음악을 들었고 어떤 책을 읽었으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돌아보는 중입니다. 

그래서 예전 메모들을 들춰봤는데 이런 게 나왔습니다.

스토리의 처음과 중간이 좋지 않은데 엔딩이 좋게 작동할 리 없다. 결국, 끝이 좋아지려면 처음과 중간이 잘 설계되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가 아니라, '끝이 좋아야 전체 이야기가 좋다'는 것. 아리스토텔레스 시절부터 현재까지 유효하다. 모든 부분의 의미는 끝으로부터 재해석된다.

- 장대건의 ‘스토리텔링과 하이데거’ 

한겨레에 실린 칼럼인데 처음 봤을 때도 그렇고 지금 다시 봐도 그렇고 이야기를 구성하는 원칙으로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끝이라는 건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끝만 바꾸는 건 불가능합니다. 아니 뭐 불가능한 건 아닌데 단순히 자신의 호불호를 기반으로 고치는 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요. 비록 자신이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나 결론이라고 해도 맥락이 이어지면 인정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개인의 기호보다 작품의 흐름이 우선한다는 논리인데… 이것도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바라보는 고전적인 관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수용자가 이야기를 자기 입맛대로 바꾸는 시대니까요.

2. 여기까지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현실은 그렇지 않죠. 하나의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잘 다듬어진 상태에서 세상에 나오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겁니다. 연재되는 작품의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끝을 모른 상태로 초기 시놉시스만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경우도 많고 지금 이 순간에서 끝이 나지 않은 이야기를 우리가 보고 있을 수도 있고요. 

그럴 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 집중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는지 없는지가 될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도 마찬가지 일 것 같아요. 맥락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보는 순간 순간은 정말 재미있었어. 5화는 정말 재미있었어. 뭐 이런 거요. 


3. 매년 이맘 때 독한녀석들은 올해는 어떻게 잘 버텼고 내년에는 잘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올해는 뒤풀이를 안 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지만 아마 다들 비슷한 생각이지 않을까 싶어요. 모임을 연기하기도 하고 아예 쉬기도 해서 12달 중 7달만 모임을 했습니다.

이야기야 흐름이 중요하지만 현실은 아닙니다. 끝이 좋으면 또 좋게 되는 게 현실이죠. 만약에 12달 중 7달을 했는데 그 중에 12월이 없었다면 훨씬 우울했겠죠. 어쩌면 독한녀석들은 2020년으로 끝입니다. 그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랬을 수도 있고요.

코로나가 한동안 잠잠해질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온라인으로 모이는 방식이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2021년도 어찌어찌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디 올해 12월에도 올해는 어떻게 잘 버텼고 내년에는 잘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는 말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보영

책을 처음 접했을때는 재밌게 쉽게 읽히는 것과 별개로, 모든 캐릭터들이 미묘하게 불편했다. 나한테 또는 주위에 있을 법한 사람들로 구성되어있으며, 프로불편러인 나에게 거슬리는 행동들만 하는 자들이다. 100%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없겠지만, 잘살겠습니다의 주인공,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의 지우는 최고로 분노하게 했고, 그만큼 책에 몰입하게 했다. 그래도 짜증나는건 어쩔 수 없다. 요즘 화가 많아졌나보다. 템페레 공항을 책 마지막에 넣은 것은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파트를 읽으면서 훈훈함이 올라왔고, 앞서서 짜증난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는 겨우겨우 책 읽기도 급급한데, 다들 작가까지 어찌 그리 잘아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단편만 보고 분노를 하거나 이야기하는데, 다각도로 느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너무 신기하다.

2020년 기쁜일이 없다고 이야기한게 슬퍼서 겨우겨우 생각해냈는데, 새로운 막걸리를 맛보게 된 것이 그나마 기쁜것 같다. 나쁜일은 카페를 가서 멍때리거나 거리를 상쾌하게 걸을 수 없게 된 점인 것 같다. 2020년을 기억해보면 마스크? 마스크가 비싸졌어? 마스크를 썼나? 마스크가 익숙해졌군...으로 끝나는 것 같다. 점점 나이가 들수록 타인의 생각을 공감하지 못하고, 타인이 하는 이야기가 나랑 안맞으면 화부터 난다. 2021년은 마스크를 안쓰면 좋을 것 같고, 생각이 지금보다는 넓어지면 좋겠다. 올 해는 사소함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는 여유가 있기를 바란다. 


영진

오랜만에 참석한 토론이었음에도 쉽게 읽혔던 책과 진행으로 편하게 토론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육아 등으로 바쁜 와중에 발제와 진행을 한 병준이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으로 토론에 참석하는 것도 이젠 익숙하네요. 좋은 건지 슬픈 건지 모르겠습니다. 

<일의 기쁨과 슬픔> 중 특히 기억에 남는 편은 ‘잘 살겠습니다’입니다. 등장인물을 보며 내가 저렇게 보일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던 적이 있거든요. 뜻밖의 자아성찰의 시간이었습니다. 

대면으로 토론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다립니다.


세진

1.

굴욕감에 침잠된 채로 밤을 지새웠고, 이미 나라는 사람은 없어져버린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되었다고. 그런데도 어김없이 날은 밝았고 여전히 자신이 세계 속에 존재하며 출근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했다. (p.51) 

내가 세계 속에 존재하며 출근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치 형벌처럼 느껴진 순간을 기억한다. 2018년 겨울.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것이 저주스러웠다. 악마 같은 얼굴들을 마주하며 또 어떤 사건들을 처리해야할지 생각하면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어둠 속에서 출근길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면 홀연히 도로 위에 뛰어들고 싶었고, 그럴 힘이 없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이대로 차가 와서 나를 들이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작은 알약들에 의존해 그 시기를 버텨냈고 지금은 그 때를 떠올려도 울지 않을 수 있게 되었지만 더 이상 나는 일을 사랑할 수가 없다. 


2. 

나도 그래요, 사무실 나서는 순간부터는 회사 일은 머릿속에서 딱 코드 뽑아두고 아름다운 생각만 하고 아름다운 것만 봐요. 예를 들면 거북이라든지, 거북이 사진이라든지, 거북이 동영상이라든지. (p.57)

일의 기쁨과 슬픔을 물어보는 토론 질문에서 나는 저 이야기를 속으로 삼켰다. 일로 인해서 기쁘고 슬픈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에는 최선을 다하지만 진심으로 애정을 주지 않는다. 일하는 나와 인간인 나를 최대한 분리한다. 직장은 돈을 벌러 가는 곳이지, 내 자존감을 챙기러 가는 곳이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거북이알을 닮아가는 중이다. 부조리하고 어찌할 수 없는 일 속에서 열심히 유영하다가, 퇴근과 함께 코드를 딱 뽑아버리고 세상에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만 보고 사는. 비단 거북이알뿐만 아니라 이 책의 인물들은 우리와 닮았다. 그래서 이 책이 좋았다. 그 ‘하이퍼리얼리즘’을 모두가 공감한 것 같아서 내심 뿌듯했던 것 같다.


3. 

토론에서 <잘 살겠습니다>와 <탐페레 공항>이 좋다고 한 사람들이 많았다.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 사회생활에서 익혀야 할 눈치와 센스가 없는 동료에게 온갖 손익과 교환을 따지지만, 끝내는 한 인간으로서 그녀의 행복을 비는 마음. 현생을 살다가 끊어져버린, 마음속 그림자처럼 남아 있는 사람과 다시 연결되었을 때의 감동. 한 해가 저물고 새롭게 시작될 때, 우리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연락하고 싶은 마음 앞에서 망설인다. 동고동락하면서 겪었던 희노애락은 잠시 접어두고 단순하게 그들의 행복을 빈다. 그렇게 사람에 대해 너그러워지고, 기대하고 싶은 마음들이 연말 토론에서 조금씩 터져 나왔던 건 아니었을까. 노란 스탠드 전등을 보면서 그런 생각들을 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아무리 삭막하고 냉혹한 세계일지라도 우리, 부서지지도 먹히지도 말자고, 잘 살아보자고. (p.230)



병준

아이의 울음에 잠을 깨 서둘러 분유를 타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3시간 간격으로 수유를 하고, 이유식을 만들고, 중간중간 아내와 둘이 먹을 끼니를 준비한다. 아이가 낮잠을 자면 설거지를 하고, 이틀에 한 번 욕조에 물을 받아 우는 아이를 씻긴다. 그렇게 9시까지 버티다 육퇴를 하면 우리 부부는 지쳐 각자의 핸드폰을 붙들고 방전된 자신만의 시간을 충전한다. '무언가 다 소진해버린 것만 같은 표정'으로.

'이렇게 살아도 되나?' 

코로나와 출산이 겹친 후 나 스스로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다. 한때는 드라마 PD의 꿈이 있었지만, 그 꿈을 쉽게 접고 별생각 없이 들어간 회사에서 그래도 마음을 다잡아가던 중이었다. 이제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한 달의 반을 집에서 아이와 씨름한다. 시간 관계상 진행하지 못했던 8번 물음 '여러분은 혹시 어떤 일을 하지 못해 마음의 짐이 된 경험이 있나요?'는 오프라인에서 진행했다면 절대 빼먹지 않았을 문항이다. 온라인 토론이 시공간의 장점이 있는 반면 침묵의 울림, 공기의 무게감 등을 재현할 수 없기에 아쉽게도 포기했다. 고해성사 같은 분위기를 원했으나 우주 공간에서 홀로 외치는 기분이 들었달까? 아무튼 성격상 한평생 후회만 하고 사는 사람으로서 지나간 꿈에 대한 미련은 오히려 없다. 돌이켜보니 당시 나에겐 두 가지 꿈이 있었다. 드라마 PD, 그리고 좋은 아빠. PD는 업의 특성상 1년의 반 이상을 집 밖으로 돌아다니니 좋은 아빠가 되기는 어렵겠다 싶어 남들처럼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 그러나 막상 평범한 회사원 아빠가 되고 보니 나머지 꿈 또한 요원해 보인다. 


괜히 남 먹는 커피 컵에 동전을 쏟아부은 느낌이다. 빛나 언니와  장우, 출산과 육아, 소설의 형태에 대한 생각 모두 내 예상과 달리 토론이 진행됐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책을 읽은 모양이다.

『잘 살아보겠습니다』의 화자처럼 나도 어쩌면 계산적일 필요 없는 빛나 언니를 몰래 부러워했나 보다. 『다소 낮음』의 장우는 마냥 한심하게 보였는데 토론을 하고 보니 내 효율 역시 4등급보다 나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연민과 동지애가 생겼다.

출산과 육아 이야기는 준비할 때부터 조마조마했지만 역시 괜히 꺼냈다 싶다. 육아에 허우적대며 살다 보니 누구나 다 그런 고민쯤은 할 줄 알았다. 한편으로는 우리 모임에서 논할 수 있는 소재의 장이 확장되지 못하고 고갈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된다. 

소설은 어때야 한다는 국룰은 없다. 나 역시도 쉬운 소설을 더 선호하는 편이라 굳이 복잡하고 심각한 이야기에 손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는 소설을 읽으며 깊이 있는 성찰과 비대한 자아를 기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소설이 가진 허구가 당연히 경험에서 출발하겠지만 그 경험에서 그치느냐 더 확장되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다. 

발제자가 아닌 패널로 참여했다면 속 시원히 할 말을 다 할 수 있었을까? 토론 후 입안에 남는 아쉬움은 언제나 씁쓸하다.


그래도 그랜드 피아노를 둘 수 있는 집이 정해져 있진 않다는 말은 정말 큰 위로가 되었다. 맞는 말이다. 대체 얼마큼 커야 아이를 들이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겐 단칸방도 충분할 수 있고, 반대로 어떤 이에겐 40평대 아파트도 부족할 수 있다. 국민 MC 유재석님도 아침에 일어나 거실에 나왔다가 아이 장난감을 밟고 넘어질 뻔했다고 한다. 이처럼 공간이 크건 작건 부모와 아이는 섞여 살아갈 수밖에 없나 보다. 그리고 그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만을 뜻하지 않을 게다. 

아이를 아직 갖지 않은 신혼 애송이들에게 한 마디 하자면, 물리적인 집의 크기보단 내 공간을 내어주고 같이 섞여 살아갈 만큼 내 마음에 여유 공간이 있는지부터 먼저 점검해 보기를.

워드 클라우드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2020년 2월 정기 모임 <사람, 장소, 환대>

2023년 4월 토론: 아버지의 해방일지

2023년 12월 토론: 사랑의 생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