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정기 모임 <사람, 장소, 환대>


<사람, 장소, 환대>

발제

정준민

발제문


위치

홍대 입구 나의 봄날

후기


종찬

가려웠던 부분들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책이어서 좋았다. 읽으면서 감탄했고, 토론도 좋았다.

그런데 하루 지난 오늘은 왠지 먹먹한 기분이 든다. 이 책이 나온지가 언젠데, 책에서 이야기하는 문제는 마치 어제 쓴 것처럼 생생하다. 그렇다고 나 하나만이라도 환대를 실천하며 살아가자고 생각해도 사실 내 욕심에 빠져 허우적대는 게 전부다. 위대하게 일어서서 용감하게 싸우며 살아가자는 위선은 여기 적을 수조차 없고, 지금 쓴 말도 진심인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많은 재산이나 특권이 갖고 싶고, 누구에게나 환영받고 싶고, 싫은 상대는 누구든 배척하고 싶고, 그 모든 걸 편하게 하고 싶다. 내가 그러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고 싶지 않다. 그러면 행복할 것 같다.

실은 방금 이 문단부터 무력감에 빠져 토론 같은 건 백날 해봐야 소용없고 난 무기력하고 못난 소시민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굉장히 길고 패배감에 젖은 후기를 썼다. 그러다 책에서 줄을 쳤던 문장이 하나 기억났다.

현실적인 (조건부의) 환대는 이 불가능한 환대의 그림자 속에서 일어나며, 이 불가능성과 관계 맺음으로써 스스로를 변형의 가능성 앞에 개방하기 때문이다.
-증여와 환대 중

알게된 것, 공감한 것들을 다 실현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이야기라도 계속 반복하고 기억해내는 게, 삶에 파묻혔다가도 문득 이상적일지언정 마음으로부터 옳다고 생각하는 것의 그림자를 확인하는 게, 결국은 우리가 변화할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옳은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건 언제든 의미가 있으며, 행동이 항상 우리의 마음만큼 따라 주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또 간지러운 생각을 해 본다.


병준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p.31

 인간에게 언제부터 자리 혹은 장소가 중요하게 된 걸까? 수렵 생활을 하며 생존을 위해 유랑하던 시절에는 확실히 지금보다 장소의 의미가 덜했을 것이다. 농업 혁명 후 정착 생활을 하게 되면서 바야흐로 계층이 생겼으니 아마도 그때부터 무리가 아닌 개인으로서의 자리 개념이 생겼을 것으로 추측한다. (결국 밥이 사람을 만들었다는…) 그 부작용으로 차별과 멸시가 생겨났다고까지 추측하는 것은 지나친 추론일까. 아무튼 덧없는 상상까지 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사람, 장소, 환대를 잇는 작가의 해석은 마치 문학적 표현처럼 느껴져 무척 인상 깊었다. 뿐만 아니라 피해자 관점이 아닌 가해자 관점에서의 법적 처벌이라든가 노예, 죄수, 전시 상황에서의 군인에 대한 인식 등이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였다. 특히 전시 상황은 아니었지만 1년 10개월간의 군 복무 경험이 떠올라 사람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받는 상황에 특히 공감이 더 잘 됐던 것 같다. 성원권을 부여받지 못한 소수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여전히 현실에 존재한다. 오히려 교실이나 회사 같은 오프라인 공간뿐만 아니라 온라인 공간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는 모양새다. 아싸가 아니라 인싸가 되기 위해 SNS에 열심히 포장하는 우리네 현실이 이전 시대보다 나을 것이 뭐가 있나.

 토론 중에는 무엇보다 좋고 싫은 감정 자체가 결국 소속감의 방증이라는 역설적인 의견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 또한 망해가는 회사에 부정적인 감정일지언정 소속감을 갖고 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비단 회사뿐만 아니라 뉴스 볼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 이유도 내 나라, 내 정부라는 소속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렇다고 용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최근 우리가 겪는 시국이 소속감을 더 끈끈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 왜란 때 의병이 그랬고, IMF 때 서민들이 그랬듯이, 우리는 이번에도 소속감에 기반해서 어떻게든 길을 찾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속감이라는 것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조건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으로 인정받는 통과 의례는 출생 그 자체이어야 한다. 부모가 되고 보니 내 아이를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는 또 다른 사람은 부모가 유일함을 느낀다. 태아는 엄마 뱃속에서 열 달간 잠들어 있지 않다. 끊임없이 부모와 교류하고 성장해나간다. 그리고 부모는 아이의 과거에 감사하고 현재를 기뻐하며 미래를 기대한다. 출생은 비로소 그 미래를 현재로 만드는 첫 관문인 것이다. 부모는 아이의 보편성이나 개성을 뛰어넘어 그 존재 자체로서 인정하고 사랑한다. (물론 살면서 잊기도 하는 것 같지만) 그리고 내 인정이 더 이상 필요 없을 즈음 아이는 독립된 인격체가 되어 있을 것이고, 그 때야 비로소 한 사람을 사회에 내놓게 되는 것이리라.


영현

1. 어려운 책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리고 읽었더니 생각보다 더 어려운 책이었다.

2. 알고 있던 철학의 주요 이슈는 주로 1)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이데아적, 이상적 인간상) 또는, 2) 어디까지 사람으로 보아야 하는가(‘사람’이라는 존재로 불릴 수 있는 조건) 이었다. 2)의 이슈와 가까운 논제를 다루는 책이었지만, ‘어디까지’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보다, ‘어떻게’ 사람이 되는가까지 포함한, 전자의 논제보다 한 단계 이전의 논제로 꽤 흥미로운 내용들이었다.

3. 토론에서도 말이 오갔던 대로 ‘성원권’은 ‘발언권’과 흡사한 것 같다. 내가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가가 성원권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가시적인 지표인 것 같다. 하지만 소속감은 또 별개의 이야기였다. 소속감을 체감하게 되는 해당 집단은 선택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아 집단에 대해 거부감이 드는 것 조차 결국 소속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이야기가 나왔던 해외입양 등 참 애매한 경계에 서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소속감은 여전히 어떻게 이야기 해야할지 모르겠다. 참 어려우면서도 끊임없이 생각에 생각이 물리는 부분이었다.

4. 한국 사회에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한 통과의례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도 흥미로웠다. 의견이 다양했지만, 평범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한 기준이 생각보다 많이 높다는 의견이 나왔고 굉장히 공감가는 부분이었다. 사람이 된 후에도 우리는 이렇게나 끊임없이 내가 정말 사람인지, 사람 사이에서 어떤 계층에 속하는지를 의식하게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5. 사람은 환대가 필요하다. 사람에게는 환대가 주어진다. 따라서 ‘사람’간의 사회에서 무조건적인 환대는 중요하다. 무조건적인 환대에 의한 존중으로 사회는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환대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 혹은 이미 받고 있으나 체감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다. 그래서 우리는 늘 사람이기 위해 애쓴다(설령 지금 사람일지라도, 계속 주변을 보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타인에 대한 평가를 통해 그들에 대한 환대 여부를 결정한다. 이 책을 통해 이젠 그 과정을 내려놓고, 정말 본질적인 무조건적인 환대를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6. 조금 더 어른이 된 후에 이 책을 다시 읽고 싶다. 그 땐 느끼는 바가 어떻게 다를지 참 궁금하다.


민규

우리는 같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음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길 원하지만 동시에 타인은 구별하여 차별적으로 대우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 인간으로서의 성원권은 당연하게 부여되길 바라면서 남들에게는 엄격한 기준을 세움으로써 우리들 중 일부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인간을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 즉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인간과 단순한 생물학적 인간으로 크게 분류합니다. 둘을 나누는 기준은 사회적 인간을 다시 세분화하는 다른 다양한 기준들보다 훨씬 분명한 경계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태아, 노예, 군인, 사형수와 같이 서로 다른 수준에서 다른 방식으로 차별받는 사례들을 분석하며 앞서 언급한 사람과 사물 사이의 가장 강력한 경계 외에도 수많은 다른 경계들이 존재함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저는 타인을 구별하여 차별적인 대우를 하는 것이 분명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인간들이 관계를 맺는 독특한 방식 때문이기도 할테지만 토론 때 잠깐 언급했다시피 본질적으로 타인을 구별하여 인식하는 인간의 본성과 더 관련된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생각대로 인간이 그러한 본성을 타고났다면 절대적인 환대가 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각자가 자신의 본성을 뛰어넘는 아주 높은 수준의 경지에 올라야 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알 듯 그것은 불가능하므로 그것을 인지한 상태에서 우리의 불완전함을 보완해줄 수 있는 좋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떤 시스템이 좋은 시스템인지에 대해선 제가 한 마디도 할 수 없을 것 같네요 ㅠ)

요즘들어 책을 혼자 읽는 것의 위험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데요, 토론은 항상 독선에 빠지지 않게 해주는 해독제(?)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혼자 책을 읽다보면 책도 받아들이고 싶은 내용이 담긴 책만 찾아서 읽게 되고, 또 그 안에서도 내가 생각하던 것들만 받아들이게 되고 그것을 반복하다 보니 사람이 더욱 독선적이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토론은 유일한 정답인 줄 알고 들고 갔다가 다른 정답들도 존재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좋은 것 같아요. 앞으로도 자주 참석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ㅎㅎ


미정

요즘들어 한국인으로 한국이라는 장소에 살고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애국심의 문제가 아니다. 코로나 유행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타국에서 한국인은 이동을 제한당하고, 혐오를 경험하고, 심지어 그 나라로의 진입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조건부 환대가 쉽게 회수당하는 뉴스를 보고있다면, 성원권을 갖고 이 곳에 자리잡은 사실이 사삼 감사하다.

 환대라는 단어는 사실 내가 한국 사회에서 현재 누리고 있는 곳이 비해 무언가 거창해 보이는 단어로 생각했다. 환영, 웃는 얼굴로의 대접 등이 떠오르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타인으로부터 성원권을 인정받고 있으며. 무엇을 다른 성원을 위해서 환대의 의미로 대접하고 있을까 의심스럽다. 그래도 이 국가적 위기에서 나의 성원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을 큰 교훈, 깨달음으로 삼고 감사해야할까?

 한편 우리는(나는) 어떤 대학교, 어떤 직장, 나아가 어떤 동네, 커뮤니티의 성원이 되고자 돈과 노력을 쏟기도 한다. 국적 외에 내가 속한 집단은 결국 나의 선택에 의해 성원권을 얻을 수 있었다. 성원권에 즐인 노력만큼 그 성원권을 얻는 사람은 그만큼 행복한 것일까?

 되돌아보면 성원권을 위한 노력을 들인 경우 그 노력이나 기대만큼 소속감을 깊이 느끼거나 필연적으로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던 듯 하다. 결국 성원권은 기본 조건이지, 미래에 대한 기대감, 만족을 얻는 것은 그 다음 얘기인 것이다. 헬조선에 대해 우연한 계기로 다소의 만족을 얻게되지만 달라진 것 없는 지금의 나처럼.

 내 삶이 어떠한 성원이 된다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성원으로 살아가느냐에 초점을 맞춰야할 때인 것 같다. 다음 스텝을 생각해야겠다.


보영

 너무 두려움을 가지고 책을 접했는지, 오히려 생각보다 책이 흥미로웠습니다.

그 자리에 있다는 것으로, 태어난 것으로 성원권을 얻는 다거나, 소속감을 갖는 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이들이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지고, 막연하게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번 모임에서 성원권과 소속감에 대한 의미를 규정하고 이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닌, 쟁취 또는 노력으로 얻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속감을 가지고, 성원권을 획득하기 위해 일정 이상의 투자를 해야 하는데, 과연 나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도 되었습니다.

 다양한 사례를 모아 하나의 주제를 설명하는 구성이 좋았으며, 부족한 부분의 이해를 도왔습니다. 이해 안되었던 부분 또는 슬쩍 읽고 지나간 부분들에 다양한 관점으로 이야기 들을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동진

일단 어려웠지만 재밌는 책이었다.아!!

이번에  재밌다는 의미를 정의해줄필요는 있다

사람과 인간의 차이 ;사람이 왜사람이고 어떻게 그 구성원이 되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서로를 환대하는 메커니즘 풀이 방식이 재밌었다는말이다. 토론에서 최근에 했던 애기중 가장 인상깊게 많은애기가 나와서 재밋었다.우정의조건쪽은 특히나 다시좀 제대로 소화시켜서 읽어보고싶은 파트였다.


세진

1. 사람에 대하여
 ‘내가 가장 부자였을 때는 태어났을 때였던 것 같다. 그 때는 놀고 먹고 자기만 해도 사랑받았는데 지금은 아니다. 동생도 봐야 하고 공부할 것은 많은데 사랑도 못 받고 관심도 못 받는다.’

작년 우리 반 아이가 ‘내가 가장 부자였을 때’라는 주제로 썼던 글이 생각났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절대적 환대를 받았고, 성원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한 살 한 살 성장할수록, 아이는 통과의례를 겪으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사람으로서 이루어야 할 과업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자연스럽게 받아 왔던 사랑과 관심은 노력해도 쉽게 획득할 수 없게 된다. 아이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한 지위경쟁과 인정투쟁에 뛰어든 것이다. 이 글을 보고 느꼈던 울컥함은, 아마 ‘사람’은 그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서러움 비슷한 감정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사람대접을 통해 사람이 된다. 반대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할 때, 즉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이 간단한 원리는 현실에서는 더 차갑고, 냉정하다. 지위와 특권이 차등적으로 분배되는 구조 속에서, 사람이 아니게 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돈, 권력, 명예, 외모, 성별, 나이, 성적 지향… ‘사람’의 잣대는 어찌나 많은지. ‘정상적인 사람’만이 사람이 되며, 그 정상성은 사실상 소수와 약자를 배제시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매 순간 순간, ‘사람’으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장소에 대하여
사람이라는 말은 사회 안에 자기 자리가 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사회적 성원권을 얻기 위한 투쟁은 사람이 되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64쪽

환대가 재분배를 포함한다는 점을 확인하기로 하자.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한다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 193쪽

사람의 개념은 ‘인정’과 함께 ‘장소성’의 차원을 포함한다.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자리를 갖지 못하며, 동시에 보이지 않는다. 놀 공간이 없는 어린이들, 아기를 데리고 갈 곳이 없는 엄마들, 집 안에만 있는 노인들, 노량진 고시원에 갇혀 있는 고시생들… 그 중에서도 나는 ‘일자리’ 생각이 났다. 취업이 되지 않는 취업준비생들, 직장에서 밀려난 퇴직자들은 절박하게 자리를 찾는 유령처럼 보인다.

그렇다. 현실에서 ‘자리’는 ‘일자리’처럼 경제성의 차원을 포함한다. ‘자리’가 있는 사람은 경제활동을 하면서 자립할 수 있지만, ‘자리’가 없는 자들은 그럴 수 없다. 또 중요한 지점은, 자리를 만들어 주는 데는 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환대는 공공성을 창출하는 것(204쪽)’이고, 공적영역의 확장은 공적 부조를 통해 이루어진다. 청년들에게 청년수당을 주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에게 실업수당을 주고, 장애인들을 위해 인프라를 구축하는 이 모든 활동에는 돈이 든다. 모든 사람을 환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람, 장소, 환대>는 그 지점을 모호하게 지나쳐 버리고, ‘사회운동의 이상’에서는 절대적 환대가 이미 도래해 있다고 선언해버린다. 결국은 이상적인 그림을 얘기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3. 환대에 대하여
그럼에도 절대적 환대에 대한 ‘이상’이 필요하다고 받아들이자. 현실에 발 딛고 사는 ‘이기적 인간’, ‘경제적 인간’에게 환대의 규범은 일상적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환대’의 연습이 필요하다. 타인에 대한 존중과 공감이 제2의 본성이 되어 마음이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인류를 지속시켜 온 ‘환대’의 본능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코로나-19가 도는 가운데, 사회 곳곳에서 보이는 모습은 ‘환대’의 힘과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확진자들은 사람이 아닌 번호가 되었다. 코로나가 휩쓴 지역은 격리되어 외딴 섬이 되었다. 사람들은 경제활동,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자리를 잃어버렸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어떤 이들은 피해를 입은 지역을 응원하는 해시태그를 올렸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마스크를 기부했다. 사람들은 환대를 느낄 수 있는 사회에 환원하고 싶은 마음을 갖는다. 환대가 어떻게 사회를 만들어 가는지를 조금은 체감할 수 있었다.

4. 책과 토론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정말 읽고 싶었던 책이라서 토론 도서로 강력하게 추천했지만, 읽으면서 강한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이렇게까지 독해력이 부족했나’ 생각이 들 정도로 독서의 과정이 녹록치 않았다. 주관적이고 편협한 해석을 더해서 겨우겨우 읽었다. 그래도 거들떠보기도 싫다기보다는, 다시 한 번 천천히 읽고 적으면서 글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충분히 음미하고 싶은 책이다. 토론은 개념 명료화에 다소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작업 없이는 깊이 있는 논제를 다룰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나는 어려운 책을 함께 읽고,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고, 반응해주는 이 모임에 소속감을 느낀다. 성원권도 아마도 갖고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독한녀석들이 모두에게 환대의 공동체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준민

저는 운명을 믿습니다. 독서도 마찬가지라 어떤 책을 읽는다면 그럴 운명, 그럴 타이밍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 장소, 환대>는 2016년 8~9월에 읽었습니다. 그해 7월은 무척 힘들었고 8월엔 많이 좋아졌으며 9월이 된 후에 책을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책을 만나고 읽는 것이 운명이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면 그 때의 제가 <사람, 장소, 환대>를 읽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과 사람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주고받는 사람대접이 절실했습니다. 7월에 취업 관련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그 때 맺어진 팀원들과 영 불편한 관계였습니다. 무언가를 해보려고 해도 잘 안 되고 뭐라고 해야 하나, 스스로 사람이라고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순간을 거치고 8월이 되어서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힘든 경험 + 읽을 여력, 이렇게 두 가지가 더해져서 <사람, 장소, 환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읽었을 때는 이해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중요하다, 환대가 필요하다 등등의 개념만 어렴풋하게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환대를 하기 위해 망각이 필요함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의 저는 제가 받은 긍정적인 경험(책의 서술을 빌리면 ‘빚’이 됩니다)을 잊지 않으려고 했고, 잊으려 한들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잊지 않았으니 그 때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글을 쓰는 거겠지만 예전 같지는 않습니다. 많이 잊어버려서 그 때의 감정이 가물가물한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잊어도 되겠구나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2020년에 <사람, 장소, 환대>를 다시 읽게 된 건 망각을 알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인 이유로 <사람, 장소, 환대>가 2월 선정 도서가 된 건 아닐 겁니다. 사회적으로 참 시의적절하구나 싶습니다. 코로나19와 신천지에 대한 기사가 연일 계속됩니다. 토론 때는 다루지 못했지만, 일련의 사태를 <사람, 장소, 환대>가 가지고 있는 시각으로 바라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많습니다.

3~4년쯤 뒤에 <사람, 장소, 환대>를 다시 읽으면 어떨까요? 이번 토론 때는 사람 대접을 ‘받는’쪽에 초점을 맞췄습니다만, 사실 상호작용은 서로 하는 것입니다. 주고 받습니다. 그 때는 받는 환대 뿐 아니라 스스로 하는 환대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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