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모임


<여름비>

발제

전세진

발제문


위치

모두의 집

후기


준민

이런 식으로 그는 결국, 읽는다는 것은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가 자신의 고유한 육체 속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거라는 걸 이해하게 됐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여름비>

모임 때 이야기 나눈 것처럼 저는 <여름비>를 책 혹은 이야기를 읽는 것에 대한 은유처럼 읽었습니다. 읽을 수 없는 것을 읽으려고 하는 것, 읽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알게 되는 것, 읽는다는 것은 결국 스스로 다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 이런 제 나름의 해석이 없었다면 중간 즈음에 읽는 걸 포기했을 겁니다. 모임 때문에 어떻게 읽어보려고 노력했겠지만 그래도 결국 포기했을 것 같아요.

모임 때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진행자가 던진 질문 이후에 발생한 공백이 너무 신경 쓰여서 그랬는데 (오프라인이면 덜 신경이 쓰일 것 같아요) 어쩌면 생각보다 할 말이 많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을 다 본 이후에 도저히 할 말이 없을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철학의 태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겐론 카페에는 시간제한이 없다. 서점에서 열리는 북 토크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심포지엄, 토크 이벤트 등 1~2시간이 기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1~2시간으로는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적어도 두 시간이 넘었을 때, 준비해온 이야기가 바닥이 났을 때 비로소 대화가 시작된다. 

- 아즈마 히로키의 <철학의 태도>

뭐라고 해야 할까요? <여름비>는 준비한 이야기를 하기 어려운 책입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야기를 준비하기가 어려운 책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아즈마 히로키가 말하는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준비할 이야기가 없어서 다들 바닥인 상태로 모임을 시작한 셈이니까요. 맥주 한 잔씩 하면서 떠들었던 뒤풀이도 그런 대화의 연장선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후기를 쓰는 지금 코로나 확진자가 연일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연말엔 모여서 하자고 여론을 모아보려 했으나 안 되겠습니다. 모임을 해야 하는 12월 말에는 지금 보다 훨씬 상황이 안 좋아질 것 같아요. 꽤 오랫동안 온라인으로만 모여야 한다는 걸 받아들여야만 하겠습니다. 온라인으로 하더라도 매번 모임마다 준비한 이야기 잘 하고 (= 준비한 이야기를 잘 털어내고) 그 이후에 나오는 대화까지 이끌어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현정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겠고 맥락을 파악하는 것 또한 어려웠으며 주관적으로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 조차 되지 않았다. 분명 읽고 있고 진도는 계속 나가고 있으나 머릿속에서 정리는 되지 않는, 그렇지만 읽기를 포기하게 만들지는 않고 오히려 독서에 막힘이 없는,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매력적인 책. 호, 불호 중 고르라고 한다면 ‘호’라고 하겠다. 근데 이런 책을 연달아서 읽는 건 불가. 앞으로 당분간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지만 흥미롭고 즐거운 시간을 선사해준 것은 분명하다.
 토론을 하면서 “아직 모든 것이 완벽했던 유년시절의 한 때”에서 이 책을 비로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불안하고 아름답지만은 않은 이 이야기가 완벽하게 느껴지는 것은 ‘유년시절’이라는 전제가 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성숙해지고 인생을 경험하면서 현실을 깨우치고 부족함의 양과 질을 점차 명확하게 볼 수 있는 지금의 내 기준에서, 유년시절의 감정과 그 당시의 상념은 현실성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완벽함을 가진다고 본다.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고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나 그 영향력은 찰나가 아니라 인생을 뒤흔들 수 있는. 감히 짐작컨대 작가는 유년시절에 가질 수 있는 많은 생각들과 그로인한 가치관에서 보는 흐름과 시선을 글로 표현해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게 맞다면 독서 후의 이 혼란스러움은 만족스럽다.


미정

어딘가 쓸쓸한 이야기 같다는 느낌만 가지고 있었던 책을 토론을 통해서 책 속 인물의 관계와 대사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떠올려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누보로망이 작가의 의식의 흐름대로 쓴 장르이기 때문에 독자가 적극 개입하여 독서하여야 한다고 하는데, 그에 맞는 토론이었습니다.

 에르네스토와 잔 사이의 관계는 제가 혼자 해석한다면 전혀 이해할 수 없던 관계입니다. 남매끼리 애잔함은 무엇이며, 언어로 표현된 것을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통달하는 에르네스토를 이해하는 평범한 잔까지. 물음표 투성이 관계들입니다. 하지만 그 물음표의 여백이 있기에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에르네스토와 잔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존경, 사랑, 그리고 비정상적이 환경에서 큰 청소년들의 심리는 어떨까까지 이르다 보다니, 역시 겉으로 보이는 것과 그들의 실제 심리와 상황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훈이 참 역지사지의 느낌이 나서 새삼 현실적입니다.

 독서와 토론을 모두 마치고 나니, 에르네스토가 참 쓸쓸해 보입니다. 실제로 에르네스토가 현실에 존재한다면 그는 천재 소년일테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책에서는 아는 것으로 인해 두렵고 외롭고 복잡함을 안고 사는 잘 자리지 못한 청소년입니다. 아무리 대단해보여도 모두가 고충을 안고 사는 것, 현실도 그러리라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어디에선가 현실과 맞닿아 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현

『여름비』가 아름다운 건 그것이 필연적으로 망가질 수밖에 없는 한순간에 대한 찬가이기 때문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현대화와 성장의 이름으로 파괴되기 직전의, 버림받은 비트리 쉬르센은 뒤라스의 손끝에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소설적 공간으로 재탄생한다. 
– 옮긴이의 말 中

1. 참 어렵고 난해한 책이었다.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 좋아해 종종 집어 들던 철학서와 흡사한 느낌이 들었다. 글씨는 읽히는데 글은 읽히지 않는.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아 이렇게 읽는 것이 맞는 건가 싶은 다소 찝찝한 기분이 들었으나 일단 책을 계속 읽어나갔다. 의미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지나간 장면들이 남는 책이었다. 술 한잔한 후 무성영화를 한 편 본 기분이었다(해본적은 없지만, 뭔가 딱 그럴 것 같다). 내용은 잘 모르겠기에 소리가 꺼져 있는 상태였으며, 장면의 연속성이 아주 매끄럽지는 않았으나 몇몇 강렬한 장면들이 있기에 저 묘사가 이 책에 대한 개인적 감상을 잘 나타내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성”에 평을 깎기보다는 “영화”에서 타인에게 추천할 만하다 싶은 책. 기억에 남는 강렬한 장면들이 인상적인 책이었다.

2. 어쨌든 나쁘지는 않은 책이었으나 읽고 나서 이해가 잘 되지는 않아 인터넷으로 몇몇 후기를 찾아보았다. 대체로 감상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으며, 극본 읽듯이 읽는 책이라는 이야기들이 많았기에 반드시 모든 글에서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겠구나 느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작가의 말은 읽지만 옮긴이의 말은 읽지 않는데, 어떤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가 아닌 그냥 작가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며, 작가의 말이면 책을 이해하는데 충분할 것이라는 선입견 하에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토론 중 옮긴이의 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자, 애매했던 부분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며, 다른 시각과 주요한 작품해석 등도 확인할 수 있었다. 

3. 옮긴이의 말을 보며 더욱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부분은, 정말 이 작품은 어린 날을 되돌아보듯, 우화 읽듯이 읽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 문장을 읽자마자 파우스트가 생각났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매년 연말마다 읽는 책인데, 읽을 때마다 그 감상이 달라지고 조금씩 파우스트의 감정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달까. 그래서 문득 여름비도 조금 더 성숙해진 후 읽으면 그 감상이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토론 덕에 옮긴이의 말을 읽음으로써, 대학 졸업 후 여름날 여름비를 한 번 더 읽어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 때의 감상이 어떨지 설렌다. 


병주

토론 시작에 말했듯이 여름비는 평양냉면과 같았다.

아무 맛이 없는 것 같은데 표현하기 힘든 그 묘한 맛, 다시 먹고 싶지는 않은데 언젠가는 한번 다시 먹고 싶은 맛,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인상적인 맛이었다.

여름비 또한 그랬다. 

오며 가는 지하철에서 책을 조금씩 읽었다. 책의 구절들은 아리송했고, 줄거리는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잘 읽혔다. 책이 잘 읽혀서인지 구절들의 의미를 찾고 생각하기 보단 그저 문자를 읽었다. 그리고 그 책을 읽는 순간은 나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토론도 비슷했다. 책을 다 읽지 않았기에 들으면서 맥락을 찾지 못한 순간도 종종 있었고, 다른 때보다 말도 많이 못했다. 다만 술도 조금씩 마시면서, 편하게 진행되는 토론이어서 그런지 그 순간만큼은 재미있었다. 

의식의 흐름대로 쓰다 보니 결국은 '의외성'에 관한 글이 돼버렸다. 모르겠다. 예전에는 의외성이 합리화의 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는데, 일에서도 그렇고 토론에서도 그렇고 묘한 만족감에 대해 이해가 점점 되고 있다. 이제 올해도 곧 끝이 난다. 마지막 한 달동안 기분 좋은 의외성이 같이 했으면 좋겠다.

다음 토론에서도 의외성이 있기를 ~

ps. 줌으로 하는 뒤풀이 너무 좋았습니다. 다음번에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세진

 [여름비]를 만난 것은 독서모임에서 알게 된 리더님 덕분이었다. 평소 책 이야기를 종종 나누던 차에 나와 잘 어울리는 책인 것 같다면서 꼭 읽어보라고 추천을 받았다. 그렇게 찾아본 [여름비]는 책 표지부터 이미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몽환적인 파스텔 표지가 너무 예뻤다. 지금 봐도 이야기와 잘 어울리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그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혼란에 빠졌다. 누구도,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고 되뇌는 에르네스토, 불에 대한 열망에 찬 잔도, 버리고 싶은 욕망을 가진 어머니도, 그 어머니를 절대 혼자 두지 못하는 아버지도, 노래를 부르다가 잠들어버리는 교사도. 그저 어딘가 결핍되고, 불안정한 존재들이라는 인상만 가진 채로,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읽어내려 갔다. 그들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은유로 자기들만 아는 비밀스러운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두 번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자 조급해졌다. 발제자로서 이 이야기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찾아야한다는 부담감이 마음을 짓눌렀다. 세 번째 읽으면서 내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던 마음의 단서들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들을 톺아보자는 마음으로 발제문을 짜냈다. 다행히 부족한 발제를 여러 가지 해석으로 채워준 참여자들 덕분에 토론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열띤 이야기가 오고 갔다. 망해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진행했는데 무사히 마무리된 것 같아 ‘독한녀석들’ 멤버들에게 정말 감사했다. 토론을 통해 가장 많이 배우는 사람은 역시 진행자다.

-

 토론을 마치고 나서, 이 이야기를 어떻게 간직하고 싶은지 계속해서 고민했다. 하나는 <인사이드 아웃>의 봉봉처럼, 어른이 되면서 소멸해버리는 유년시절의 찬란함을 그린 것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무엇인가를 알기 전, 무용하고 순수한 존재로서 살아가던 시절의 이야기. 또 다른 하나는 백지의 상태에서 진리의 극단으로 나아가는 초월자의 성장 이야기로 읽고 싶기도 했다. 전자의 여름비는 순수했던 존재가 삶에 추락해버리는 순간을 알리는 총성처럼, 후자의 여름비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다른 차원을 열어내는 신호탄처럼 느껴졌다. 

 여러 가지 해석을 곱씹어 보다가, 결론을 내렸다. 불완전하여 완벽한 유년시절을 지나가 고고히 나아가는 홀로서기의 과정. 에르네스토는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면서 동시에 무엇인가를 얻었으리라. 여름비가 내린 후 그의 안에서 어떤 삶은 죽음으로, 어떤 죽음은 삶으로 환생했으리라. 불안정한 10대와 20대를 거쳐 여름비를 흠뻑 맞으며 죽지 않고 살아남은 나 자신을 위로하는 기분으로, [여름비]를 내 마음대로 그렇게 간직하기로 했다.

 여러분도, 각자의 여름비를 흠뻑 맞고 살아남은 여러분도, ‘죽음과 같은, 돌과 같은 삶’(p.195)을 함께 살아가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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