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모임









<개인주의자 선언>

발제

정준민

발제문


위치

모두의 집

후기


병준 

'세상이 복잡하다고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신념과 분노에만 의지하다가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도 최악의 결과만 가져올 수 있다. 의심하고, 근거를 찾고, 다시 생각하고, 아니다 싶으면 주저 없이 결론을 바꾸는 노력 없이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깨어 있어야 한다.'

개인주의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기대하고 책을 읽었으나 실상 저자의 인생관 혹은 세계관이 주를 이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북하거나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작가의 관점이 크게 보편적인 상식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리라. 같은 종류의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까닭도 역시 많은 사람들이 맞는 말에 허기져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개인의 삶을 존중하며 서로 연대하는 사회란 치트키 같은 말인데 현실에서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 좁은 땅덩어리 내에서 그런 마인드가 가능할까 싶기도 하고, 또 갑자기 그렇게 되면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싶은 괜한 우려도 생긴다. 나는 집단주의에 어울리는 사람일까 개인주의에 어울리는 사람일까? 성향 상 개인주의가 맞지만 집단주의에 편승하고 싶은 소시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요즘 말하는 '인싸'라는 것도 결국은 개인주의하고는 상반된 개념일 게다. 한 평생 '아싸'로 살아온 내가 이 나이 먹고도 아직도 '인싸'가 되고 싶은 열망을 갖는 걸 보면 인간 본성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모두 갖고 있는 모양이다.

아이가 없을 땐 교육에 관해 뚜렷한 의견이 없었다. 개천 출신으로 용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개천은 벗어난 사람으로서 더 이상 내가 받을 교육은 없어 보였으니까. 근데 아이를 갖고 보니 이게 또 대충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내 아이를 내가 살아온 것처럼 키워도 될까? 아니면 남들처럼 키워야 할까? 부모가 된다는 건 선택에 책임을 지는 일의 연속이다. 조국 교수가 개천에서 용이 되지 않아도 행복한 사회를 만들자고 주장한 것에 대해 나는 아직 이렇다 할 답을 찾지 못했다. 내 아이가 용도 되고 행복하기도 한 사회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일까? 허태균 교수의 '어쩌다 한국인'에서처럼 모두가 부자가 되지 않아도 행복한 사회란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다리 걷어차기를 합리화하는 논리로 사용되는 기분이 계속 드는 건 내가 너무 비관적인 탓일까? 아마도 최근 부동산 정책에 너무 많이 데인 까닭인가 보다.


현정 

근래들어 에세이를 모아 발간한 책이 잘 읽히고 흥미를 끈다. 누군가는 이러한 책들을 '남의 뇌구조를 엿보는 것 같다.'라고 표현한다. 일상생활에서 친구들과 공감이 가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입버릇처럼 말한다. "역시 사람 사는 것 다 똑같아.", "역시 사람 생각 다 비슷해." 사람은 수 많은 공감을 통해 감정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삶의 각박함을 치유하며 '나만 그런게 아니다'라는 안심과 다시 일상에서의 힘찬 내일을 보내게 하는 에너지를 충족한다. 점점 현실을 깨닫고 세상과 협의점을 만들어가고 있는 30대. 저자가 표현하는 한국의 '집단주의' 문화에 대한 내용이 가장 크게 와닿았고 길이길이 인용해서 써먹을 것 같다. 저자의 삶에서 경험하고 성찰한 다양한 내용을 바탕으로 풀어나가는 글인 만큼, 책에 손을 댄 독자라면 적어도 어느 한 구석은 눈길이 가고 기억에 유의미하게 남을 것이리라 생각한다. 막연히 나의 기록을 남겨놓는 것에 욕심이 있는 1인으로서 이 책은 공감과 흥미를 넘어 지금 당장 휘발되기 전 요즈음 나의 이야기를 써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든다.


병주

2011년에 고등학교 입학을 했으니 올해는 고등학교 간 지 10년이 된 해이다.  분명 년초에 한번 가자 했던 것이 미루고 미뤄져, 10월에야 가게 되었다. 7년 만에 찾은 모교는 코로나 시국이어서 그런지 토요 자습을 하는 학생도 없었다. 수업을 들었던 미래관, ivy관, 국제관 등 주요 건물은 닫혀 있었고 유일하게 자습실만 열려있엇다. 7년만에 들어와본 자습실은 우리 때와 똑같았다. 노트북 하나 놓으면 가득 찰 것만 같은 좁은 자리와 불편한 각도의 나무 의자 그리고 자습 감독 선생님 자리까지 우리 기억과 그대로 일치했었다. 많은 시간을 보냈던 자습실을 보는 것만으로도 친구들과 1시간 가까이 떠들 수 있었다.  

우리랑 얘네랑 얼마나 달라졌을까란 생각을 하며 낙서 구경을 시작했다. 이젠 베테랑이 되었을 신입 선생님의 이름이 보였고 모교의 선생님이 되었다는 학교 선배의 이름 또한 보였다. 사물함에 가득 찬 낙서의 양을 보니 7년 전의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이 친구들도 졸리다는 핑계로 사물함에 서서 낙서를 하며 웃고 떠든게 분명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낙서를 보다 8년 전 사물함에 써놓았던 '서호정 개새끼'란 낙서를 봤다. 정말 아무 내용도 없고 휘갈겨 쓴 낙서였다. 맥락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친구가 낙서를 하는 모습 그리고 낙서를 지우라고 뭐라하는 어린 호정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7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낙서가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으며 그 당사자 둘과 같이 그 낙서를 보고 있어 너무 좋았다. 

이게 기록의 의미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최근 들어 자소서를 많이 쓰다보니, 단문과 글의 의도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편안한 글을 쓸 때도 나의 생각을 적기 보단 우선 단문으로 잘라야지, 이 글에서 이게 필요한 말인가? 계속 되네이며 생각을 하게 되고 몇 글자도 적지 못한채 시간을 보내게 된다. 8년이 지나도 남아있는 '서호정 개새끼'를 보며 느낀 건 일단 그 순간을 기억나게 할 기록을 작성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며, 잘 쓰고 못 쓰고는 부차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판사 문유석의 글이 좋았듯이 자신만이 쓸 수 있는 글이 매력적이라고 했던 준민형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지금 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sales 에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분명 이 순간에 남기는 글이 매력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며, 돌아올 자소서 시즌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퇴근하면 너무 피곤해서 그리고 글 자체가 부담이라 침대로 가게 되었다. 사물함 위에 적힌 '서호정 개새끼'처럼 부담을 덜고 덜 정돈된 상태로라도 일단은 조금씩 적어봐야겠다. 

PS:일하는 도중 밀리지 않고 후기를 내셨던 형 누나들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늦어서 죄송합니다.


세진

홀로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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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개인주의인가. 이 복잡하고 급변하는 다층적 갈등구조의 현대사회에서는 특정 집단이 당신을 영원히 보호해주지 않는다. 다양한 이해관계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타협해야 한다. 그 주체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p.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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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판사는 합리적 개인주의자가 우리 사회에 많아져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그가 말하는 '합리적 개인주의자'란 무엇인지, 합리적 개인주의자라면 어떤 특징을 가질지 이야기했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내린 결론은 '좋은 사람이라면 합리적이고 개개인을 존중하는 사람이겠지'였습니다. 발제자가 이야기했듯이 '합리적', '개인주의'라는 단어가 긍정적 가치를 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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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합리적 개인주의자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확실히 개인주의 성향이 아주 강한 사람입니다. 학창 시절 나의 생리적 욕구와는 관계 없이 친구들의 화장실 동행이 되어야 하는 것이 늘 피곤했고,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학급 전체가 다 같이 혼나야 하는 전체 체벌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가족과 연인과의 시간도 중요하지만 나 혼자만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반면 그 앞에 '합리적'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는 망설여집니다. 내 경계를 소중하게 지켜야 할 확고한 이유가 있었는지, 내가 양보하고 존중받기를 바라는 만큼 타인을 그렇게 대했는지 생각해보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또, 나의 욕망대로 살지 못하고 타인의 욕망을 투영하며 살아왔다는 생각도 듭니다.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외로워서', '심심해서', '허영심으로' 움직인 것이 있었고, 그때의 나는 내면의 공허함을 채워주는 집단에 무의식적으로 의존하곤 했습니다. 확실히 합리적이지는 못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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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으며, 정서적으로 평온하고, 따라서 스스로를 지키며 올곧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요. 나를 단단히 세워야겠습니다. 그러면 행복은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 같습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필사적으로 찾아다니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행복이 찾아드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보영

바쁜 업무중에도 글을 계속 쓴 작가는 대단하다. 
그 보수적인 집단에서 개인을 말하는 판사여서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말이 작가 자신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라고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초반 읽었을 때는, 머릿속에 남은 문장도 없었다. 
판례 부분들은 흥미가 생기는 내용이 있기는 했다.
판사로 들어간 재판에서 지겨워서 그냥 듣고 있었다지만, 나홀로 소송하는 아주머니가 들어줘서 고맙다고 했다는 사례를 보면서
일부 법조계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생각이 있어서 그런지, 그동안의 재판 과정이 상상이 돼서 불쾌하기도 했다.
그나마 작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좋은 관점을 보여주고, 반성해야 한다고 이야기도 종종 한다.
이런 판사들도 있어야지, 그렇지... 
내가 생각하지도 못하는 상황을 알려주었고, 내가 생각하지도 못하는 생각을 한 작가의 글을 보는 것은 새롭기는 했지만,
내가 다양한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한 점들이 아쉬웠다.
작년인가 일부 읽었을 때는 재밌어하면서 읽은 것 같은데... 이번에 읽을 때는 뭐 이리 다 별로로 느껴지는지....
요즘 행복하지 않아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작가는 개인의 행복을 찾았는데, 나의 행복은 어디서부터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만약 이번 토론에 제대로 참석하고,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들었다면 이 정도까지 부정적으로 생각이 되지 않았을 수 있다.
다시 한번 모임 참가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듣는다는 것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준민

1) 후기를 쓰는 오늘 에리히 프롬의 <자기를 위한 인간>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의 초반부에서 프롬은 '권위주의적'이란 단어를 쓸 때 개념을 명료하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단어의 개념을 명확히 하지 않고 쓰면 독재적인 권위 혹은 아예 권위가 없는 이상한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요.

(적어도 책의 초반까지) 프롬이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권위는 합리적 권위입니다. 합리적 권위는 능력에서 나오며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다른 사람을 착취하거나 악용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전체적이고 반민주적인 비합리적 권위도 존재합니다.

토론 때도 이야기했듯 개인주의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합리적인 개인주의는 좋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집단주의는 어떨까요? 많은 분이 집단주의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겠지만 사실 이 또한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습니다. 합리적인 집단주의가 나쁠까요? 전근대적인 집단주의는 (아마도) 논쟁할 것 없이 나쁠 것입니다. 전근대라는 수식어는 매우 높은 확률로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니까요.

어떤 수식어와 함께 사용하는지에 따라 단어의 인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수식어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인상을 마치 그 단어의 고유한 속성처럼 이야기하려고 할 때, 저는 불편합니다. <개인주의자 선언>이 불편했던 것도 논의가 불분명하다는 것도 그래서 그랬습니다. 합리적인 개인주의는 좋은 것이지만, 자신밖에 모르는 개인주의는 나쁜 것이겠죠. 

저자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다르다고 말하지만 (이건 굉장히 '정치적인 의도를 가진' 수사법이에요. 부정적인 수식어를 개인주의와 연결시키지 않으려고 원천적으로 철벽을 치는 거죠.) 언어적으로 어떤 수식어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개인주의도 이기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2) 솔직히 온 힘을 다해 토론을 준비하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건 오롯이 참여해준 분들의 덕이겠죠. 집단의 조화를 고려하는 합리적 개인주의자 덕분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싶네요.

토론 때는 행복의 크기와 빈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이상하게 남성분들은 크기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여성분들은 빈도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아아 언젠가 연애를 하게 되면 꼭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신경 써야지.

생각해보면 지금부터 신경 써야 뭐라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3) 흔히 유학은 한국 사회의 병폐로 지적됩니다. 만악의 근원입니다. 하지만 유학에서 '능력 없는 사람'을 사용하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제가 읽어 본 경전 중에는 그런 말이 없었어요. 사람을 능력에 맞춰 적재적소에 쓰라는 말은 많았지만요.

뭐랄까, 서양의 능력주의라는 관점도 굉장히 사대주의적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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