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정기 모임 [혐오의 시대 철학의 응답]
<혐오의 시대, 철학의 응답>
발제
박종찬
발제문
위치
종로 스터디룸 인
후기
병준
‘언어란 행위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토론 초반 ‘혐오’의 필요조건을 정의하며 ‘권력’이 언급됐다. 나는 온라인상의 혐오는 권력이 눈으로 보이지 않으므로 딱히 필요조건이 아니라 주장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며 다시 생각해보니 온라인상에도 권력은 분명 존재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수’라는 이름의 권력이다. 온라인에서처럼 날아든 혐오에 바로 대항을 할 수 있다면 둘 사이 권력의 턱이 낮고, 사무실에서처럼 대항의 의지조차 갖지 못한다면 권력의 턱이 높다. 결국 높이의 차이만 있을 뿐 혐오의 화살은 늘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날아간다.
아직도 ‘노키즈존’이 혐오 표현인가에 대한 나름의 판단이 명확하지 않다. ‘No kids’라면 혐오 표현이고 ‘Only for adults’라면 표현의 자유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득 바보 놀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 문제를 ‘표현’과 ‘의도’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저자는 혐오를 설명할 때 의도를 강조하지만, 의도와 함께 표현 자체도 중요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누군가 또는 무엇을 싫어하는 감정이 억압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를 떠나 인간 감정에 대한 구속이고 이는 12월 토론에서 더 깊게 다뤄지리라 예상한다. 반면에 표현 자체만 보았을 때 ‘노키즈존’은 확실히 혐오 표현이다. 책에서는 대항 표현에 대해 주로 다뤘으나 거기서 더 나아가 혐오를 혐오로 들리지 않게끔 표현하는 노력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자신이 접했던 혐오 표현’이라는 논제에서 나는, 삼십몇 년을 살면서 다행히도 기억에 남을만한 혐오 표현을 듣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잘 처신해서가 아니라, 단지 내가 가해자들이 가진 속성에 가깝게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이리라.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어떤 해결책이나 정답은 크게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혐오의 시대에 태어날 내 아이가 부디 운 좋게 무리와 비슷한 속성을 갖고, 소수보다는 다수의 편에 서 있기를 부모 된 심정으로 바랄 수밖에. 하나 기대하는 건 우리 사회에 더이상 절대다수가 존재하지 않고, 무수히 많은 소수로 나누어지기를. 그리하여 타인에 대한 인정과 배려가 하루빨리 싹트기를 소원한다.
준민
혐오 표현에 관해서 이야기 하는 건 어렵습니다. 혐오 표현이 무엇인지 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나쁜 말이라고 해서 혐오 표현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특정 개인에 대한 악플 같은 것들은 보고 있으면 스트레스를 유발하긴 하지만 혐오 표현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토론 때는 "1.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 2. 상대방을 상처 주기 위한 의도가존재" 이렇게 두 가지를 가지고 있을 때 혐오 표현이 된다고 합의하고 진행했습니다만, 생각해보면 중요한 전제 하나가 빠져 있습니다. 어떤 특성으로 묶을 수 있는 '집단'에 대한 발화를 놓고 우리는 혐오 표현이라고 합니다.
저는 혐오 표현에 예민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혐오 표현, 농담처럼 지나가는 말들에 웃어넘기곤 하지만, 사실 마음 한쪽으로는조금은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대한 반응일 뿐입니다. 제 자신이 혐오 표현을 하는지 안 하는지는 제대로 돌아보고 있지는않은 거죠. 저 또한 농담처럼 혐오 표현으로 들릴 만한 위험한 발언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것들을 농담처럼 하는 것도 문제겠지만, 더 문제는 인식하지도 못하고 하는 것들이겠지요.
분명히 있을 테지만 그래도 나는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토론 때도 그런 태도였지요.
언젠가 과거와 현재의 제가 하는 혐오 표현을 알게 되는 순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그건 그때로 미뤄두고 지금은 지금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심한 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것들요. 정체성, 권력, 집단 이런 것들을 다떠나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의도로 말을 하고는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고 싶습니다. 의도를 가지지 않고도 상처를 줄 수는 있지만 뭐 그것도 일단은 뒤로 미뤄두고요.
어떻게든 상처를 내려고 하는 말들을 조금이나마 줄이는 게, 살아가는 데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진
혐오라는 말이 남용되는 시대아닐까요? “싫어한다”, “미워한다”, “안 좋아한다” 싫어함을 뜻하는 여러 말이 있지만 유독 혐오가많이 쓰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단어는 꽤나 강한 표현이어서 계속 듣자면 점점 피로해지는 걸 느낍니다. 말하는 이도피곤, 듣는 이도 피곤.. 부정적인 자극을 주고받는 데 익숙해지진 않았나 생각하게 되는 책이었습니다.
혐오표현에도 ‘선빵 필승’이 적용되는 걸까요? 글에도 나와 있지만 혐오표현을 무방비상태에서 듣게 되면 말문이 막히고 사고가안 돼요. 이렇게 잠시 그로기 상태에 있다가 반격(?)을 하려하면 이미 상대는 ‘쌩~’하고 지나가거나 말을 꺼내기 애매해진 상황.. 말 그대로 두들겨 맞은 거에요.
혐오표현에는 표현 발화자와 대상자를 주로 다루지만, 주변의 제3자 또한 대상자 못지않게 정신적 타격을 받아요. 이걸 토론 때절실히 느꼈습니다. 특히나 말로 하는 ‘표현’은 ‘대상’ 뿐 아니라 듣는 모든 이가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혐오표현을 삼갑시다.
보영
책을 거의 못읽고 참가하여, 후기때라도 다 읽고 후기를 제출하려했는데.... 결국, 반절 읽었습니다. 다음에는 최소 90%읽고 참가하겠습니다.
노 키즈존 , 복장 규정 등의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 한 것에 혐오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된 자리였고, 나도 결국 혐하는 사람중에하나 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생각없이 하는 말 중에 혐오 섞인 말들이 정말 많다는 것에 언어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언어를 통한혐오는 일상 생활에서 물을 마시듯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습니다.
혐오하는 자를 혐오한다고 하지만... 나 역시 혐오하는 자인 것 같아서 자기 반성의 시간도 갖을 수 있었습니다. 무심코 사용하는단어 안에 있는 여러 의미들을 파악할 수 있고,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이 활발하게 전달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송이
많이들 현재를 혐오의 시대라고합니다. 그래서인지 어느순간부터 혐오라는 단어 자체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를 꺼리게 됐습니다. 사실 혐오,혐오하지만 어떤 것이 혐오인지 사회적으로 합의된 정의가 없기도하고... 하여튼 뭔가 께름칙했습니다.
이 책은 혐오에 대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의문을 완전히 해소해주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가볍게 많은 내용을 훑기에는 꽤 괜찮았습니다. 특히 대항표현의 타당성에 관한 내용이 기억에 남습니다. 소수자는 그들의 언어를 가지기 힘드니까요. 수없이 혐오표현으로 공격받은 자에게 품위를 지켜서 반박하라는 말이 또다른 폭력이 될 수도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여전히 혐오표현(모임에서 혐오를 임의로 정의한 바에 의하면)이 자행되는 것에 놀랐습니다. 특히 전 직장인들은 배울만큼 배우고 다들 나름의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원색적인 혐오표현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아직도 그 단어가 아른거리네요.
전공시간에 교차성이라는 개념을 배운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어려운 개념이지만 단순화시켜 얘기하자면, 나는 어느 차원에서는소수자이지만 또 어느차원에서는 다수자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저는 한국 국적을 가진 내국인으로 외국인보다는 다수자이지만 여성이라는 측면은 소수자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나서 더욱 혐오표현에 대한 날을 곤두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측면에서는 다수자인 제가 무심결에 쓰는 혐오표현이 분명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모임에서 언급하였듯 면접에서도 혐오표현의 형사규제에 대한 문제가 나왔습니다. 이때 저는 혐오표현 자체를 규제하는 것은 실효가 떨어지며, 혐오표현이 발생하게 된 사회구조적 맥락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에서의 이민자혐오 유럽의 난민혐오를 그 예시로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왜 우리는 혐오를 하는지에 대해 합의된 명백한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혐오를 하지말자! 를 넘어 왜 우리는 명시적 혹은 암묵적으로 혐오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이번 시간이 상당히 유익하게 느껴졌습니다. 역시나 더 많은 생각과고민이 필요하다는걸 많이 깨닫고 갑니다.
혜리
혐오란 단어가 매일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살고 있다. 토론에서도 나온 이야기지만 혐오를 이전보다 예민하게 느끼기 때문에 더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것 같다.
토론을 하면서 나도 살면서 많은 혐오들을 하며 살아왔음에 반성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혐오 표현들이 너무나 익숙하게 유행어처럼 퍼져있고, 삶에 곳곳에 묻어있는 것을 보고 나도 더 주의를 기울이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토론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노키즈 존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노키즈 존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또 기혼여성들에 대한 배척의 위험이 크기 때문에 이러한 차별행위들을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되는 게 큰 문제가 될 것 같다. 그리고 이런혐오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다 보면 또 자정작용이 이루어지고 변화들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토에서 꼭 다루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한 주제였는데 이번 기회에 책을 읽고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세진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1. 바야흐로 혐오의 시대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혐오라는 감정이 이처럼 크게 부풀어있던 시기가 있었나 싶습니다. 경기 침체와 취업난으로 개개인의 삶은 어려워지고 시스템에 대한 분노는 커지는데, 그 분노가 해소되지 못하고 갈 곳 없는 에너지로 엄청나게 요동치고 있는 느낌입니다. 늘 주변에 공기처럼 머물다가, 사소한 불씨만 튀어도 화르륵, 하고 불화살이 되어 날아와 꽂힐것 같은 기분입니다. 특히 약자에게는 더욱 쉽게요. 여성, 아동, 노인, 장애인, 다문화, 난민… 개인의 정체성이 곧 혐오의 이유가되는 것을 보면 무섭습니다.
2. 책에서 소개한 혐오표현의 네 가지 범주-모욕, 선동, 종속, 무시-는 발화에 따르는 행위이자 효과입니다.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없었지만, 혐오의 현장에 던져졌을 때마다 느꼈던 감정이 선명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모욕감. 유쾌하지는 않지만 묘하게 설득당하며 선동되는 기분. 나의 존재가 무시당하는 기분.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은 유리천장에 갇힌 기분. ‘피해자의 경험이 곧증거다’라는 페미니즘의 구호가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혐오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때 나의 감정이 주는 시그널에도귀를 기울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 저는 혐오를 감지해내는 것은 감수성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용인되었던 언어와 행위에는 분명히 차별과 폭력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편안했을 침묵에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약자들의 고통과 상처가 있었을것입니다. 언어 속에 담긴 혐오의 속성을 찾아내고, ‘혐오표현’이라고 이름표를 명확하게 붙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에서도이야기하듯이 언어는 행위이고, 세계이며, 그 사회의 범주를 반영합니다. 누군가의 침묵을 담보로 하는 폭력적인 세계에 안주한다면 나 역시 그 폭력의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될 테니까요.
4. 솔직히 말하자면, 가끔은 아무것도 모를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 번 혐오를 인지하게 되니 많은 것들이 무심코 넘겨지지가 않습니다. “남자친구 집안이 전라도냐”고 물어보는 엄마의 말이 불편합니다. “요즘은 여자애들도 일을 잘 해”라는 아빠의 말에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보이루”, “앙기모띠”라는 말을 킬킬거리며 내뱉는 남학생들을 보면 분노가 치밉니다. “그 엄마는 대체 애를 어떻게 키우는거냐”고 육아의 책임을 엄마에게만 돌리는 동학년 선생님의 말씀조차도 귀에 거슬립니다. 출퇴근길 지하철에 우르르 타는 노인들을 보고 무심코 화가 나는 나에게도 화가 납니다. 혐오에 민감해질수록 내 마음과 주변에서 온갖 혐오가 느껴집니다. 나만 진지해서 상처받고, 예민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피곤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환멸감이 듭니다. 니체의 말처럼, 심연을 들여다보다가 심연에 빠지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혐오에 대항하려다가 혐오를 더 증식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무섭습니다.
5.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후기를 정말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두 걸그룹 멤버가 세상을 떠났고, 제가 가장 좋아했던 가수의 2주기가 있었습니다. 특히 설리의 자살 소식을 들으면서, 혐오에 대한 대항이 너무나 무력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성 아이돌에게 요구되는 기대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희롱과 여성혐오의 폭격을 맞았고, 수많은 악플에 노출되다가 죽음에 내몰리는 모습을 보면서 참담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대항표현은 또 다른 혐오 앞에서 너무나 약한 것이 아닐까 무서웠습니다. 개개인의 대항표현이 가지는 무력함은 그렇다 치더라도, 국가 중심의 대항표현은 충분히 강력한가. 약자에 대해 대항표현이 적극적인현 정부에 대해 ‘꼴페미정부’, ‘인권팔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이 가해지는 것을 보면 오히려 역풍이 오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합니다. ‘정권 바뀌면 두고 보자’는 보복심리가 현실이 될 때, 다시 ‘혐오스러운 사회’로 돌아가지 않을까 무섭습니다.
책을 다시 펼쳐보고 생각을 해봐도, 혐오의 시대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혐오스러운 사회에서, 혐오를 허용하는 사회로 가고 있는 방향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침묵의 무게만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보다는 혐오에 대해서 시끄럽게 떠들고 와글와글한 세상이 조금 더 좋을 거라 믿습니다. 혐오에 침잠하지 않고 끈질기게 말대꾸할 수 있도록, 조금 더 단단해져야겠습니다. 피곤하고 무거운 책이었지만 함께해서 조금 더 감내할 수 있었던 것 같았어요. 함께한 모두에게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동진
먼저 책 내용을 보자면 최근 혐오 차별적 발언이나 집회등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을 다룬 책이라 의미가 있는 책이었다.혐오발언에 대해 발화자 수화자 입장과 사회언어학적인 접근도 적은 파트이긴했지만 흥미로웠으며 토론에서도 생각보다 민감한 주제지만 많은 애기를 나누다 보니 내가 의도치않게 혐오발언이 아닌가도 생각해봤다.다소 아쉬운점은 책제목에서처럼 혐오의대한 반격에 대한 이야기는 무게감이 없지 않나라는 아쉬움은 남기며 후기끝
종찬
처음 이 책을 고르게 된 계기는 혐오에 대한 혐오에 대한 (오타가 아니다) 고민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혐오하는 말이나 행동이 죽도록 혐오스러웠다. 자기가 생각하는 올바름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이 그 기준에 맞지 않다는 이유를 내세워서, 사실 대부분은“나는 올바르다, 나는 정상이다”라는 식의 안심을 얻기 위해서 누군가를 비난하고 폄훼하는 행동을 보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화가 치밀어 오른다. 구역질이 난다. 그런데 그 역시도 내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그들을 재단하고 비난하고 폄훼한 것은 아닐까 하는의심이 나를 괴롭혔다.
그것 때문에 혐오라는 키워드로 책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는 내가 여성혐오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갖게 되었다. 예전에 어떤 여성분에게서, “지금의 어른들은 자신들이 받은 교육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평등한 교육이 시작된다 하더라도 3세대가 지나기 전까지는 자유로울 수 없을 거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결국 내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그저 시늉에 불과할 거라는 말은, 그 말이 실제로 얼마만큼의 진실을 담고 있는지와는 별개로 이해를 포기하고 싶게 만들었다. 마음한켠에서는 다른 내가 속삭인다. 그냥 혐오하고 산다 해도 별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권력을 가진 한국 남자의 입에서 희희낙락하며 혐오가 숨쉬듯 쏟아져 나오는 걸 본게 한두번인가. 그 사람들은 이런 고민도 하지 않을 것이다. 죽어 자리에 누울 때에도 자랑스럽게 누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까 아마 나는 위선을 부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의 공정함을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저들을 이렇게 미워할 정도로 내게는 공감 능력이 있다.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다. 되뇌이면서. 하지만 실제로 혐오를 대면하고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내 모습은 위선으로 비추어졌을 것 같다. 이해와 공감은 얕았고, 인정욕구만 뿜뿜하고 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오니까 다시 이런 고민조차 하지 않을, 속편하게 드러누울 인간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적어도 그들과다르다는 안심을 얻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들을 열과 성을 다해 미워해야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 그나마 덜 위선적이면서 의미있는 것은 그것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말 한 마디 하는 거부터 사는 거까지 다 불편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토론에도 인용했던 TV프로그램에서, 독일에 가서 인종차별을 당한 한국인의 경험담이 나왔다. 그때 가장 힘이 되었던 것은 다름아닌 다른 독일인들의 그 인종차별주의자에 대한 연민이었다고 한다. 그런 사고를 가진 사람은 어딘가가 잘못된, 그러니 불쌍한사람이라는 인식이 있다는 것이다.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이미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거니까. 적어도 그런 분위기를 돕는 사람 중에 한명이고 싶다. 혐오를 드러내는 사람은 자신이 혐오의 대상이 될 것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각오가 안 되어 있어서 당황하고 화가 난다면 더 좋지만서도.)
한편으론 이런 생각들을 머리에 넣고 토론 준비를 하는 시간은 굉장히 쉽지 않았다. 내가 나를 믿을 수 없었기에 토론에서 혐오에대한 2차 피해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혹시나 토론 중에 내가 무신경하게 발언한 게 있다면, 이 자리를 빌어 사과를 전하고 싶다. 더불어서 부족한 발제인데도 항상 그 빈자리를 꽉꽉 채워주는 멤버들에게 고맙다. 연말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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