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정기모임 - 러브 레플리카

토론 도서

러브 레플리카

발제자

전세진

장소

종로 마이크임팩트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 45-1

후기


종찬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 에니어그램은 6번, MBTI는 ISPF.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을까요.

-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싶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지 않을까요.

- 어떻게든 규정당하는 것이 싫다. 하지만 동시에 좋다. 편하다. 


사람은 자신의 이미지를 늘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 하는 것이 이미지죠. 자신이 아주 좋아하는 것 — 즉 의지할 만한 무언가가 나타나면 그것을 좋아하는 나 자신이 내가 추구하는 이미지가 됩니다. ‘적당히 어떤 것을 광적으로 좋아하지만 사실은 삶에 시달리는 어떤 덕후’ 같은, 내가 바랐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사실은 자기가 만들고 있었던 이미지가 되기도 하죠.

그 이미지에 만족하는 동안은 그럭저럭 살아갈 만 합니다. 하지만 가끔 틀어질 때도 있고 다 싫을 때도 있죠. 비슷한 이미지가 빛을 잃고 초라해지기도 하는 겁니다.

쿤은 그런 무언가인 것 같습니다. ‘타인이 나를 이렇게 본다고 생각하는, 일부는 그렇게 봐주었으면 하는, 내 머릿 속에만 존재하는 어떤 이미지’요. 가끔 나의 진실과 다르다는 것이 한밤중에 드러나는 그런 거요.

이러한 쿤과 나의 실상과의 차이는 각자의 자신과의 화해의 정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내가 받아들인 나의 모습만이 내 이미지에 실릴 자격이 있죠. 내가 생각했을때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무언가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인정받지 못한 채 남죠. 가끔 떼를 쓰고 싶은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사비나는 자신의 옛 연인이 결국 시골의 바에서 일하는 지고지순한 여자와 여생을 행복하게 보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만은 그런 ‘키치’에 갇혀 살지 않을 거라 믿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사비나는 자기 자신이 어떤 이미지로도 규정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하지만 이미지란 그 영역을 넓히는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자유로운 영혼’ 같은 이미지를 쉽게 만들어내 버립니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여주인공 중 하나인 키티는 자신이 존경하던 부인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는 사건을 겪습니다. 그 직후 키티의 아버지가 나타나 그 부인을 ‘OO주의자’라고 부릅니다. 그러자 신비롭고 반짝반짝 빛났던 그 부인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고, 그냥 어떤 주의를 신봉하는 늙은 여성이 남아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의 의견에 대해서 가장 잔인하게 묵살하는 방법은 그 의견에 이름을 붙이는 일입니다. 너는 OO주의자구나’ 하는 식으로요. 그가 하는 말의 내용 그 자체에 대해서 하나 하나 의문점을 제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용감하고 위험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듣기에 무서운 것들에 재빨리 이름을 붙이려 합니다. 이름을 붙여 분류해 버리면 더이상 두렵지도, 부럽지도, 아무렇지도 않으니까요. 그는 'OO주의자'고 나는 아니기에 그들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완벽하게 타인의 눈으로 무시하면서 관조할 수 있습니다.

너무한 얘기긴 해요. 조금 취해서 썼기 때문인 거 같아요.

이런 생각을 계속하지 않으면, 좀더 진심으로 따뜻하게 살자고 작정하면 또 괜찮은 곳으로 나아갈 수도 있긴 할 거 같습니다.

윤이형은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입니다. 나는 그런 이미지를 붙여 이 무서운 사람을 재단해 버리겠습니다. 재단하는 동시에 공감이 생겨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좀더 느긋하게, 좀더 행복하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미정


침묵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발제문에서는 두 군데에서 침묵이 나왔습니다.
첫번째, 할머니는 대니에 대해 왜 침묵했을까. 
두번째, 딸기는 루카와의 관계에서 침묵했다는 것.
두 문제 모두 토론 때 흥미롭게 이야기했던 주제였습니다.
공적인 것이 아닌, 오로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건에서 입을 닫는다는 것은 잘잘못을 따질 문제는 아닙니다. 루카에 대해 딸기가 침묵한 것은 서로 다른 점을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딸기가 다소 잘못한 것으로 결론이 나기는 하였습니다만, 
글쎄요, 때로는 억지로 하는, 마음대로 뱉어대는 말들이 오히려 오해를 낳고 구차함을 낳고 그리고 루카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요.
다만 지나고 보면 침묵도 떠밀린 것이 아닌 제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 되어야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할머니와 딸기 모두 씁쓸한 결론만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어딘가 제 모습이랑 비슷해보여서 괜히 두둔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토론이라는 공적인 자리에서 침묵을 깨고 열심히 진행하였던 발제자와 참여자들에는 언제나 얼마든지 감사와 수고의 박수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재밌는 비침묵이었습니다.






윤정


몇달만에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책읽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들었습니다.

무슨말인지 정확히 이해되지 않는데도, 이어지는 이야기를 한편씩 아껴놓은 치즈카스테라와 커피를 마시며 야금야금 읽었습니다.

아름다운 단어인 '러브(사랑)'가 제목에 들어가고, 핑크색 제목, 표지에 이끌려 달콤한 초콜릿같은 내용을 기대했지만 사랑(감정)이란 이름안에서 우리가 겪는 갈등, 고통, 아픔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재미있었습니다. 이제 어릴적에 읽던 동화속 이야기 보단 지금의 내가 겪는 고민들을 책과 공감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거울수있는 이야기들을 독한녀석들과 함께 편히 나눌수 있다는것 또한 언제나 책을 즐겁게 합니다.

다소 논술문제같았던 발제문은 생각을 깊게 해주었고, 나름의 질문과 답을 찾아볼 수 있었던 시간이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조금은 더, 새로오신 토론자들과 가까워지고 그들의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는 시간을 기대합니다.

맨 처음 토론에 와서 무척 어색해하고 떨었던 저도 지금은 편하게 나와 일상의 이야기를 털어내며 느끼는 즐거움을 꼭 느끼셨으면 합니다.






민경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소설 굿바이. 읽는 내내 무슨 말인지 무슨 내용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마지막 페이지에 나오는 설명글을 읽고 다시 한번 읽고 또 한번 더 읽었던.

태아와 아기 엄마 그리고 친구인 기계인간 어둡고 아름 답지 않고 그닥 밝은 미래를 그려주지 않는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궁금했다. 모두가 평등하고 동등했던 기계인간들의 삶에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의 차이가 생겼고 실패했고 실패의 여파는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돌아왔다. 무언가 열심히 열심히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 하고 나와버렸던 그런게 생각이 났을 지도.

태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이라는걸 하긴 하는지.. 작가는 태아가 상당히 과격하고 어두운 표현을 주로 쓰고 솔직할 것이라 생각했나보다. 소설 속 태아는 엄마를 위하는 마음이 큰 친구 혹은 부모와 같은 존재 같았다. 훗날 내 아이는 내 뱃속에서 나를 사랑하고 좋은 생각만 하고 예쁜 마음을 가지고 건강했으면 좋겠다라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유일하게 현실에서 살고있는 엄마는 삶이 너무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기계인은 인간의 삶을 포기했고, 태아는 죽으려 했으나 엄마는 끝까지 포기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힘들어도 아파도 포기하지 않고 직장을 다니고 김밥을 먹고 아기를 낳았다. 엄마는 그런 존재인가보다.





준민


모임이 끝나고 세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준민옹이 평소보다 말을 많이 했다고.

그랬나요? 저는 평소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자신은 알 수 없습니다. 그 판단은 다른 분들에게 넘기고 제 속마음을 말해보죠. 답답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하지 못해서요. 후기를 쓰기 위해 꺼내든 발제문에는 이런 메모가 남아있습니다. 『루카』도 『러브 레플리카』도 그 애를 떠올리게 해서 여기서는 말할 수 없을 거야 라고.

에둘러서 말을 해보려고도 했습니다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무언가에 대해서 말할 때는 세밀하면 세밀할수록 잘 전달됩니다. 디테일이 있어야 하죠. 그건 너무 세밀한 기억, 세밀한 감정이라 그 자리에서는 꺼낼 수 없었습니다. 그럼요. 어떤 일은 그저 어쩔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후기를 쓰는 건 왜 일까요? 알 수 없습니다. 거짓말입니다. 사실 알고 있습니다. 이기심이죠. 조지오웰은 작가가 글을 쓰는 동기로 네 가지를 뽑는데 그 중에 첫 번째로 순전한 이기심을 말합니다.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고 잘난 척하고 싶고 뭐 그런 것들. 요즘 말로 과하게 비꼬면 관심종자 정도가 될 겁니다. 그래서 씁니다.

이번 모임의 화두 중 하나는 『쿤의 여행』에서 쿤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의지할 무언가’라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르면 달라질지 모르지만 지금의 저는 그렇게 읽을 수 밖에 없습니다. 많이 의지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그 애를 챙긴다고 바라봤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는 반대입니다. 챙겨준 게 아니라 그저 마음 둘 곳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겁니다.

갑자기 적출 수술을 받고 지금은 쿤과 떨어진 상태입니다. 하지만 쿤과 헤어진 건 아닙니다. 아직도 쿤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곤 하니까요. 언젠가는 쿤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날이 올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쿤과 헤어진 건 아닐 겁니다. 저는 분명히 쿤에게 의지했던 순간이 있었고 그 순간을 포함해서 지금의 제가 그리고 미래의 제가 있겠지요.

『러브 레플리카』는 그래서 좋았습니다. 『러브 레플리카』에 나오는 문장 몇 개를 제 멋대로 오려 붙여보겠습니다.

경의 자리는 창가 쪽인 24A였다. 나는 24B였다. 경은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 손의 온기가 그대로 있었다. 그 여행을 떠올리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즐거웠던 기억뿐이다.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를 이렇게 바꿔 놓은 것은 그 여행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제 경에게 연락하지 않는다.

이것은 『러브 레플리카』의 여행 이야기를 함축하는 것이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온전히 제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어떤 부분은 사실이지만 어떤 부분은 사실에 근거한 왜곡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그 애의 자리가 창가였고 제 자리는 복도였지만 좌석 번호는 24A와 24B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 애의 손을 잡아주었지만 아무 말도 안 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건, 그 여행을 떠올리면 여전히 미소가 떠오른다는 것, 누군가가 묻는다면 저를 바꿔 놓은 것은 그 여행이라고 대답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이제 그 애와 연락하지 않는다는 것이겠지요.

경험한 그 순간을 진품이라고 한다면 그 외의 모든 것은 복제품(레플리카)입니다. 기억조차도 그 순간에 대한 복제품에 불과합니다. 혹자는 사람은 추억으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추억을 기억을 진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얼마든지 오려 붙이고 다시 그릴 수 있는 복제품인데요?

아아, 그렇다고 제가 기억이나 추억의 가치 없음을 말한다고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예전부터 꾸준히 주장했듯 저는 진정성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기억이나 추억을 복제품이라고 말한 듯 가치를 떨어트리는 의미는 아닙니다. 경험한 그 순간은 그 순간대로 추억은 추억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저 인정하자는 겁니다. 자신을 지탱해주는 추억도 어쩌면 복제품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저는 오늘도 씁니다. 그 때의 순간을 제멋대로 오려 붙여가면서 복제품을 만들고 그 복제품을 보면서 그 순간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웃고는 또 다른 복제품을 만들겠죠. 그렇게 무한히 반복되는 레플리카들.





병준


"말들은 장식이다. 혹은 허상이다. 기억은 사람을 살게 해주지만 대부분 홀로그램에 가깝다."

- p.47 '대니' 중에서

어떤 말들은 사뿐히 내 맘에 내려앉아 꽤 오랫동안 출렁이게 한다.
윤이형의 소설집 '러브 레플리카'에는 그렇듯 씹어 삼켜 살 찌우고픈 표현들이 많았다.
'자신과 타인의 정체성에 대한 믿음과 다름의 인정'이라고 주제를 붙이기엔 내 부족함이 부끄러울 정도로 심오한 내용이었고, 그간 내 발제를 되돌아 보게 할 만큼 속 깊은 발제였다.
물론 책에는 불친절에 가까운 서사가, 토론에는 불안한 논제들이 있었지만 책과 토론 모두 만족스러웠다.

특히 토론은 내가 그간 '취하고 사용하고 버린' 쿤들을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나의 쿤은 한 때 친형이었고, 오랜 기간 술이었으며, 지금은 대리라는 직책 자체인 것도 같다.

그러나 쿤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그 힘든 시간들을 넘길 수 있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너와 내가 만날 수 있었을까. 그러한 이유로 쿤 없는 과거와 쿤과 함께 만든 오늘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언제나 난 오늘이다.

'어떤 일들은 그저 어쩔 수 없고 어떤 일들은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넣은 동전만큼 정확하게 무언가를 내주지도 않고, 혐오를 사랑으로 바꾸지도 못하는' 그러한 일들을 대책없이 하다보면 쿤이 되었건 자라지 못한 내가 되었건 엘로보다 행복이란 것에 더 익숙해질 날이 오지 않을까

다시 한 번, 기억은 사람을 살게 해주지만 대부분 허상일 뿐이다. 진짜가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것이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있을 거란 확신은 든다. 하루가 끝날 때마다 오늘은 진짜 내가 살아낸, 진짜 하루가 맞는지 토템이라도 돌려봐야겠다.





보영


표지가 예뻐서 마음에 들었던 러브 레플리카... 반전 매력에 좌절할 뻔 하였으나 부족한 이해력을 채우고 나니 내용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나에게 태어났을 때부터 할머니일뿐, 나를 키워주는 사람이지 자신의 삶을 가진 여자라는 존재로 인식되어있지않았던것 같다. 그래서 대니를 읽었을 때 할머니와 로봇의 관계보다 로봇처럼 보인 할머니를 한 사람으로 인식되게 한 부분이 새삼 새로운 충격이었다. 쿤도 대니도 루카도 너무도 당연하게 살고있던 나에게 당연함이 당연함이 아닐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해주어서 좋았고다. 특히 내가 해석한 쿤을 의지의 존재로 이해하게되어 다시 읽어보니 이제는 새로운 이야기로 다가왔다. 
그리나 일상의 일을 새로운 관점으로 생각하게 한 윤이형작가의 다른 작품은.. 읽어보진않을테다..
100일임에도 나와서 매끄러운 진행을 하고 사라진 세진이에게 박수를... 끝~





병주


책을 처음 읽고 나서 든 생각은 뭐지?였다. sf적인 요소를 내 상상력이 이해하지 못하였고 책이 주는  모호함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너무 궁금했다. 토론이 끝나고 생각해보니 어느정도 그 의문이 풀린 것 같다.
내가 맘에 들었던건 쿤이었다. 쿤 또한 너무 모호하게 느껴졌었다. 토론에서 나왔던 여러 해석 중 역시  페르소나의 쿤이 참 공감이 많이 갔던 것 같다. 요즘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벌써'이다. 이 단어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친구들이 하나 둘 졸업을 하고 자기 길을 찾아가는데에 비해 우린 너무 어린것 같은 혹은 나이만 많아진 느낌을 받기 때문인 것 같다. 쿤의 주인공인 '나'도 나와 비슷한 느낌 아니었을 것 같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주변의 요구에 따라 살다보니 '나'의 성장은 15살에 멈추었고 나이 40까지 쿤만 커진게 아닐까?





혜윤


읽으면서 이해가 가지않아 버거웠던 순간들이 많았지만 단편 전체를 관통하는 '우울함'은 오랫동안 남아있는 것 같다. 고도로 발달된 환경속에서 인간의 자유, 감각, 추억에 대한 습관만큼은 발달되지 않은채 쓸쓸히 멈춰져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인것 같다. 비인간적으로 발달된 환경속의 인간적인 인물들은 소외와 미성숙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던 것 같다.   
그동안 인류는 발명과 발전을 거듭하며 점점 이동속도가 빨라지고 불편한 일들은 편리하게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점점 빠르고 편리해질수록 오히려 사람들과의 거리는 멀어지고 불편해지는게 아닐까? 사람이 자라는데 필요한 시간과 (누군가에겐 불편할 수 있는) 손길의 결핍이 결국 소외와 미성숙을 촉구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세진


독한녀석들에 합류한 후 처음 발제자라는 역할을 맡은 토론이었습니다. 덕분에 하나의 책을 아주 깊게 읽어보는 소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동안 발제자들께서 어떤 마음으로 토론을 준비했을지 생각해보니 그동안의 독서에 반성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더군요. 앞으로는 언제나 발제자의 마음으로 성실하게 책을 읽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져봅니다. 저 이상으로 이 책을 열심히 읽어주시고 토론해주신 독한녀석들 여러분께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 역시도 SF적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참 즐거웠습니다. 비현실적인 설정속에서 주인공 사이에 오가는 감정들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나’의 문제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 어딘가 결핍되어있는 정서가 나 자신과 닮아있어 무심코 공감해버리도 말았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내 세계에 가두려고 상처를 준 '딸기'였으며 다른 이에 대한 부러움으로 그들의 삶과 모습을 따라했던 '경'이기도 했습니다. 집채만한 쿤을 이고다니는 사람이기도 하며 다른 엘로를 피하려다가 더 엘로를 키우고 마는 '마르한'이기도 합니다. 어딘가 성장하지 못하는 그 인물에 나를 대입해보며 그래, 그래도 괜찮지 않겠어, 다독이며 나름 치유의 시간을 가진 것 같기도 하네요.


어렸을 적 사랑은 완전무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뜻하고, 두근거리고, 설레고,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는 강한 감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근거없는 신화임을 알게 되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부족한 나에 대해서는 꽤 오래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내 안의 질투나 열등감과 맞닥뜨리는 순간, 침묵과 갈등을 마주하는 순간이면 나는 나의 자존감과 사랑의 능력을 문제삼으며 아파했습니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은 아름답지 못한 감정으로 끝날지언정 그 역시 ‘레플리카'라고,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기억조차도 삶의 연료로서 쓰고 살고요. 그렇게 나를 격려하면서 다른 이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성장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레플리카들을 인정하고 나의 엘로를 인정하고 나의 쿤과 손잡고 걸어가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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