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너무 한낮의 연애 후기



너무 한낮의 연애

발제자 배병준

후보였던 책 없음.

일시 2016년 8월 27일



세진
개인적으로 장편보다 단편을 좋아한다. 짧은 서사 속에서 인물들이 자신의 색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것이 매력적이다. 이야기 속의 그들이 낯설다가도 나와, 나의 세상과 닮은 지점들을 목격할 때면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순간들을 많이 경험했다. ‘너무 한낮의 연애’의 필용을 볼 때, ‘세실리아’의 정은을 볼 때면 과거의 상처 앞에서 어쩌지 못하는 불안정한 나를 겹쳐보곤 했으며, ‘반월’에서 반복되는 ‘왜’라는 단어 앞에서 세월호가 떠올라 먹먹함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쉽게 읽히지는 않기에 최소 두 번은 읽어야 가치를 알 수 있는 책, 그렇지만 여러 번 읽어볼수록 매혹적인 책이라고 감히 평하고 싶다.

 책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의식이 무엇이냐는 발제에 대해서 나는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애써 치유하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인정하고, 바라보고, 그 세계에 대해 초연해지는 과정’이라고 답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더 생각이 떠오른다는 모 법칙처럼 상처는 애써 치유하려고 할수록 더 파고드는 것 같다. 행복해야지, 행복해야지 하면서 발버둥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흔들림을 붙잡으려 애쓰지 말고 그냥 그대로 놔두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양희가 ‘나무’를 보는 것처럼. 

 토론으로 말하자면 발제자께서는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지만, 나로서는 지적으로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제목의 의미에 대해, 인물의 행동에 대해,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소재에 대해 물음을 던져보는 것- 사실 수능 언어영역을 응시했다면 모를 수가 없는 방법론이다. 그럼에도 ‘왜’라는 작은 물음표 자체를 지우고 지냈음에, ‘재미있다’ ‘감동적이다’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저차원적인 독서를 해 왔음에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다. 부끄럽지만, 조금 더 용기를 얻으려 한다. 토론에 참석한 분들을 통해 능동적인 독서를 할 수 있는 동력을 얻은 것 같다. 토론에서 못 다한 이야기들(어제 유난히 ‘지나간 세계’에 대해서 천착했다)은 뒤풀이 자리에서 조금이나마 더 나누고 싶어서 들떠서 떠들어댔는데, 조금은 솔직한 이야기가 되었을 런지.   

 마지막으로 ‘수업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교육계의 격언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토론의 질은 독자의 질을 넘어서지 못한다’라고. 모두가 만족스러운 토론을 위해, 독자로서의 예의와 노력을 보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참을성 있게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내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 각자 의미 있는 것은 다르다고 한들 나에게는 의미 있던 문장과 작품이 폄하당하는 느낌이 들었을 때 솔직히 유쾌하지는 않았다. 내가 고른 책에 대해서도 그렇게 이야기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함께. 좋아할 수는 없어도 존중하는 마음으로, 다음 토론에서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이상.


종찬
내가 처음으로 토론에 참여한 것이 3년 전, 2013년 9월의 일이었다. 2016년 8월을 기점으로 정확하게 3년을 참석했다.

그 중에서 참석하지 않았던 토론은 1회, 참석한 토론은 35회였다.

처음 토론을 시작할 당시에 있었던 사람들 중 지금 안 나오는 사람도 있고, 새롭게 토론에 참여하게 되어 멤버가 된 사람도 있다.

2014년에는 '발목잡힌 청춘들' 이라는 원래 이름에서 벗어나 '독한 녀석들'로 재출발을 했다. 각각의 사정이 있었고, 계속 토론을 유지하고 싶은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 사이의 온도차가 있었다. 이미 형성된 관계를 깰 필요는 없었으니, 토론을 살리고 싶은 사람들만 모아서 새로운 팀을 만들었다.

그 당시에 원래 있었던 토론방에선 토론을 중지하는 것으로 하고, 새롭게 만든 토론방에서 출발했다. 로고도 만들고 블로그도 만들었다. 그 이후 적어도 한 달에 두 번은 거의 보았고, 매주, 심지어는 매일 보는 기간도 있었다.

직업을 가지면서 생긴 인연을 제외하면 이 '독한 녀석들'이란 나의 성인이 된 후의 인간관계의 거의 모든 것이다.

그래서 독한 녀석들은 내게 아주 소중하다.

어제는 지난 35회의 토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당연히 책이나 토론이 마음에 드는 날도 있고 아닌 날도 있었다. 책도 다 읽지 않고 참여한 적도 많았다. 참을성이 있는 성격이 아니라, 미안한 줄 알면서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책을 읽지 않고 토론에 참여하는 행동을 농담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다.

토론을 준비하는 발제자는 참석자 모두의 토요일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열심히 책을 고르고, 발제하고, 장소를 예약하고, 뒷풀이 장소를 섭외한다.

그 모든 과정은 먼저 자신이 토론에 참여해서 보낸 즐거운 시간에 대한 고마움으로, 또 때로는 책임감으로 이루어진다.

이번 토론은 (적어도 나에게는) 그 과정에 대한 존중을 우리가 좀 잊고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사족이 길어졌다.

너무 한낮의 연애는 겉과 속이 다른 책이었다. 아주 상쾌한 색의 표지를 가지고 있는 것 치고는 내용이 보송보송한 편은 아니다. 마주보기 힘든 것들을 어느새인가 마주보게 하고, 그 상황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삶을 어떻게 살아내는가. 그 과정을 담담하게 잘 풀어냈다.

좀 어두운 색으로 만들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해보았다. 그런데 그러면 손이 잘 가지 않는 책이 되었을 것 같다. 마주하기 힘든 일들을 견뎌내는 내용을 담은 책이 표지까지 우울하면, 읽는 동안 계속 괴로웠을 것 같다. 세상엔 힘든 일, '상한 고기'나 '사라진 개'도 있지만 또 빛나는 일, '전망'이나 '옥상' 같은 것들도 있으니까.

개를 기다리는 일과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고 보통의 시절 이렇게 세 편에서는 마무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한 시절의 마무리와 일상의 계속 혹은 다른 시작.

무언가가 영원할 거라는 생각이나, 영원하자고 주장하는 걸 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그래서 있는 동안은 정말 소중하게 여기고, 또 끝나면 추억하며 새로 시작했으면 좋겠다.

내 삶의 다음 끝은 무엇일까, 또 다음 시작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하는 시간이었다.

*후기에 필요이상으로 감정을 실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불쾌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미안해요. 조금 수정했습니다.


미정

너무 한낮의 연애.

고기, 개를 기다리는 시간, 반월, 이렇게 각 수록작의 제목을 떠올려야 어제의 토론이 그려집니다. '너무 한낮의 연애'라는 서정적인 제목에는 어울리지 않는 토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혼자 침잠해서 생각해보아야할 문제가 많은 토론이었습니다.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이라는 논제가 맘 속에 떠오릅니다. 저는 잊어야할 문제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속에 남아있는 잊어야할 문제를 떠올리면 스스로를 너무 미성숙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성숙하다는 사실을 계속 잊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네요.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절대적인 사람 수가 작고, 따라서 책을 잘근잘근 씹어낼 사람도 적어서 그런 거겠죠.
개인적으로는 소수 토론은 발언의 기회가 많아서 좋습니다. 다만, 책이라는 재료를 정성스레 다듬어온 토론자와 진행자가 있어야 순도 100%의 토론이 되겠지요.

마지막으로 너무 한낮의 어제 토론 장소를 잊지 못할 것 같네요. 탁월한 장소 선정에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현정

처음 책 제목과 표지를 보았을땐 강렬한 연애 소설인 줄 알았는데, 단편집임에 한 번 놀라고 전체적으로 암울한 분위기에 두 번 놀랐습니다. 우선은 책 전체적으로 무의식의 무언가.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우울하고 암울한 그 분위기가 꺼림칙하거나 달갑지 않은 것이 아닌 어느 누구나 약간은 가지고 있을법한 그러나 평상시에 굳이 들추어내지 않거나 억지로 한켠에 묻어두었을 것들을 보란듯이 서술해놓은 책인 것 같습니다. 첫번째 너무 한낮의 연애를 제외하고는 모두 애매하게 스토리가 마무리되지만 독자의 입장으로서는 그 부분이 상당히 마음에 들고 마무리가 지어진  이야기를 읽은 것 같았습니다. 어렵지만 술술 읽히는 잘 쓰여진 책인 것 같고 한 번 더 읽어봐야 이 책을 읽어봤다 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재승

기어이 그 뜨거웠던 여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날, 우리는 여느때처럼 모여 토론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마치 개울가에서 입을 내밀고 있는 개구리처럼. 떠나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는 걸까, 아니면 어서 가라고 보채는 걸까. 유난했던 팔월의 햇빛처럼 강렬했던 그 소설은 각자에게 어떤 모습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소설의 난해한 부분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었고, 오히려 그 난해함을 일광욕하듯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내리쬐는 햇볕과 숨쉬기도 버거운 더위는 분명 우리를 힘들게 했지만 그만큼을 살아낸 우리에게 가을은 보다 일찍 다가왔고, 반가웠다. 소설속의 에피소드들을 읽으면서 맞닥뜨렸던 궁금증과 어려움만큼,  토론은 선선하고 반가웠다. 모두에게 힘겨웠던 오전을 지나 곧 한낮을 맞이할 우리들의 삶에도 또한 반가운 그 무엇이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가 든다. 부디 그 한낮의 시간에도 이곳에 있기를.    


병준

여느 때처럼 출근길에 소매를 올렸다가
다시금 단추를 채운다.
2016년 8월은 내게 정말 ’한낮의 연애’였다.
숨가쁘게 놀면서 일까지 잘 하려다보니
언제나 소매를 걷어 부치고 여기저기 뛰어들었다.

이제는 바람도 차갑고 마음도 차가워져 온다.
슬슬 소매를 내릴 때가 된 것 같다.
불편한 기억들을 토로하면서 그 민낯을 바라볼
그런 기회를 소망했었는데, 모두 내 부덕이다.
나 혼자 너무 한낮에 달아있었나보다.
이제는 소매를 내리고 잠시 열을 식힐 때이다 싶다.

부족한 발제자를 위해 여러 번 책을 다시 읽어준

패널들에게 사죄와 함께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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